이 세상 저 세상

무주 청화(無住 淸華, 1923~2003)

이 세상 저 세상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此世他世間(차세타세간) 去來不相關(거래불상관)
蒙恩大千界(몽은대천계) 報恩恨細澗(보은한세간)


● 50여 년 동안의 장좌불와와 일종식, 생과 사를 넘나드는 토굴에서의 고행 수도로 인간의 일체 속박에서 벗어난 이가 바로 청화 스님이다. 먹고 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이겨내어 마침내 생과 사를 초탈한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선지식이다.


| 일화로 읽는 청화 스님 이야기 |
법거량(法擧揚)

어느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청화 스님의 높은 법력을 듣고 그와 법거량을 펼치기 위해 스님이 머무는 토굴을 찾았다. 그러나 청화 스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젊은 스님은 청화 스님이 분명 자신이 토굴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자리를 피했다고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그와 법거량을 펼쳐보고자 무작정 기다렸다.
해가 질 무렵, 청화 스님이 토굴로 들어섰다. 청화 스님은 그 젊은 스님에게 일단 저녁 공양이나 하자며 바랑을 풀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시는 청화 스님이 젊은 스님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공양을 찾아 길을 나섰던 것이었다. 허나 젊은 스님은 기가 막혔다. 청화 스님이 가져온 밥은 이미 쉬어 터져서 한 숟갈 뜨자 죽처럼 늘어졌다. 게다가 푹 시어버린 김치는 아주 잘게 썰어져 있었다. 젊은 스님은 이 음식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에 청화 스님은 그 밥과 김치를 자신의 발우에 담아 비빈 후 깨끗이 비웠다. 그 모습을 본 젊은 스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스님과 펼치고자 했던 의기양양한 법거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과 사를 뛰어넘은 대자유인 무주 청화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청화 스님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중 징병을 당해 한국으로 끌려왔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사재를 털어 지금의 망운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벌이다가, 동서양 철학에 심취하여 공부하던 가운데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이후 40여 년간 20여 곳의 토굴을 옮겨다니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과 자리에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수행을 계속했다. 또한 무너져 버린 곡성 태안사를 일으키기 위해 3년 동안 일체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고, 묵언정진을 통해 결사를 마무리했다.
1995년에는 미국에서 금강선원을 열었으며, 귀국하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과 성륜사 조실로 있으면서 수행정진했다. 이 같은 치열한 수행 정신과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셨던 청화 스님은 모든 수행자들의 지표가 되고 있다.

<b>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기는 침묵의 언어</b><br/><br/>“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서 사람들이 스님의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br/>“나는 그런 거 없다.”<br/>“그래도 한평생 사셨는데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br/>“할 말 없다.” <br/>“그래도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br/>“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br/><br/>위의 일화는 2003년에 입적하신 서암 스님의 임종게, 즉 열반송(涅槃頌)이다. 큰스님들이 열반에 들기 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우리는 열반송이라 부른다. 열반송은 대부분 한시의 형태이지만, 앞서 살펴본 서암 스님의 열반송처럼 형식적인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br/>열반이란, 수행을 통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얻고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다. 때문에 불교의 수행자들은 열반이라는 죽음을 앞두고 이를 맞이하는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스님들은 이렇듯 죽음의 순간을 열반송이라는 기쁨의 노래로 바꾸어 부르며 그들의 세속의 먼지가 쌓인 이생의 삶을 마무리했다. <br/>열반송은 정적과 같았던 삶의 끝에서 외치는 생의 노래이자, 세상 끝에서 홀로 읊는 시 한 자락이다. 스님들이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에서 벗어난 적멸의 순간에 직접 전하는 마지막 한마디이기 때문에, 선승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내뱉는 화려하고 비유적인 오도송(悟道頌)과 비교해 보면 무척 소박하고 담담함을 알 수 있다. <br/>하지만 우리는 이 짧은 열반송을 통해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의 삶의 흔적과 선(禪)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 선의 세계에는 만남, 이별, 고독, 명상, 영혼, 침묵, 진리, 귀향이 담겨 있으며, 바람, 별, 달, 해, 구름, 비, 나무, 바위 등 자연의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다. <br/>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대 선승 65인의 열반송을 담았다. 이러한 열반송과 더불어 선승들이 펼친 화두와 촌철살인과도 같은 일화, 그들의 걸어온 길을 사진작가 이상엽의 사진과 함께 묶었다. 짧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스님들의 열반송을 하나씩 곱씹어 보며 누구나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