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이 어두운 거실 한복판에 서서 린은 주위를 계속 둘러보았다. 긴장감이 일순간 풀리자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갑자기 어찔했다. 진탕 마신 상태에서 100미터 기록 세우듯이 뛰었으니 몸이 불타듯 뜨거워지는 게 당연했다. 린은 겉옷을 벗어 테이블이라 짐작되는 곳에 던져놓고 소파를 간신히 찾아냈다. 그대로 주저앉은 그녀는 별안간 들려온 신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소파 위에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시커먼 형체가 잠시 꼼지락대더니 곧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유민…… 이니?”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듯 그가 맨가슴으로 누워 있었다.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손끝마다 열기가 들끓었다.
“유민아? 유민아? 정신 좀 차려봐!”
어깨를 살며시 흔들며 볼을 톡톡 때리자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목에 손가락을 얹고 맥박을 체크해보니 비교적 정상치에 가까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우선 열부터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린은 필요한 물건들을 손으로 더듬거려 하나씩 찾아냈다. 한참 만에야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전부 늘어놓고는 소파 근처 바닥에 앉았다. 정전 때문에 반쯤 녹은 얼음조각들을 수건에 싸서 이마께에 올려놓고, 작은 세숫대야에 떠온 물에 연신 수건을 적셔 달아오른 몸을 반복적으로 닦아 식혀주었다.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그의 거칠었던 숨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있었다. 볼을 쓰다듬어보니 열도 어느 정도 내려 있었다.
‘휴, 다행이다, 그냥 몸살이었나 보네. 이대로 잠들게 할까? 다시 열이 오를지도 모르는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축 늘어진 그의 팔을 어깨에 둘러 낑낑대며 일으켜 앉혔다.
‘이 녀석 겉보기엔 좀 말라 보이더니,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혀를 빼고 숨을 헐떡거리다가 약봉지를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구름에서 조금 벗어난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 린은 눈물이 찔끔거릴 때까지 약병의 글씨들을 읽고 또 읽다가 겨우 해열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유민아? 약 좀 먹자. 음? 먹고 자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린은 계속해서 말을 시켰다. 그가 잠에서 깬 듯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탁한 신음 소리 속에서 잠을 깨우려는 그녀에 대한 짜증이 묻어났다. 아기 어르듯이 달래가며 입을 벌려 알약을 넣고는 물을 조금 마시게 했다. 꿀꺽하는 소리에 안심하려는데 기침과 함께 튀어나온 알약이 린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그는 물만 삼킬 뿐 약을 삼키지는 못했다.
‘어쩌지? 그냥 재워야 하나?’
순간, 어릴 적 봤던 만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카리스마 백배의 남주가 정신 잃은 여주에게 키스로 약을 먹이는 그 에로틱했던 장면. 린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어른들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몰래 훔쳐보던 그때처럼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 이건, 그냥 의, 의학적 접근일 뿐이야. 우, 유민이랑 하고 싶었던 이, 임상실험하고는 저, 전혀 상관없어. 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다, 당연히 해야 할 해, 행동이지, 아, 암 그렇고말고.”
린은 자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듯 중얼거렸다. 지금 말을 더듬는 건 거짓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알코올에 취한 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마른침을 한번 꼴딱 삼킨 그녀는 입에 알약 하나를 털어 넣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양 볼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드디어. 입술에 닿았다. 뜨겁고 부드러운 말랑한 입술.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린 린은 잠시 입술만 맞댄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두 손바닥으로 그의 볼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입술이 스르르 열렸다. 주저하던 그녀는 알약이 올려져 있는 혀를 조심스레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를 안쪽 깊숙이 찔러 넣어 약을 떨어트렸다. 혀의 근육이 당길 정도로 알약을 몇 초간 살살 밀었는데 그가 그것을 꿀떡 삼켰다. 한시름 놓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녀는 신기함도 느꼈다. 정상적인 키스가 아니긴 하지만 남자와의 접촉에서 비위가 상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럼, 쭈 말이 사실인 걸까? 내가, 정말, 유민일 남자로서 좋아하나?’
두근두근하는 입술을 떼려는데 갑작스레 상대편의 혀가 감겨왔다. 흠칫 놀란 린은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미는 동시에 얼굴을 들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몸에 더욱 달라붙게 되었다. 어느새 한 팔이 그녀의 머리칼을, 다른 한 팔이 그녀의 어깨를 빈틈없이 움켜쥐고 있었다. 아프도록 혀를 빨아대는 것도 모자랐는지 입술까지 잘근잘근 깨물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은 단순한 의료행위였을지 몰라도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건 분명히 키스였다. 아주 에로틱하고 야만적인 키스. 평소 유민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거친 키스에 린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어다녔다. 정신을 차린 건지 만 건지 그의 키스는 더 깊어만 갔다. 이 정도면 수년간 품어온 소원은 충분히 성취됐으니 이쯤에서 그만둬야 했다.
린은 가슴 사이에 낀 팔을 겨우 꺼내 어깨를 두드리며 유민을 수없이 불렀다. 그렇지만 그녀의 노력은 웅얼거림으로 그쳤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꿈틀대는 그녀의 혀에 자극받은 듯 그가 더욱 깊숙이 혀를 찔러댔다. 묵직한 몸무게가 자신에게 실린다는 것을 느낀 순간, 등이 거실 바닥에 닿았다. 소파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충격으로 몇 초간 심장이 다 멎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이어진 그의 행동에 린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 요동쳤다. 셔츠 속을 파고든 손이 브래지어마저 파고들더니 가슴살을 한 움큼 쥐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강하게 옥좨왔다. 그녀의 하체에 꼭 들러붙은 그의 남성이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얘 왜 이래! 유민아, 정신 좀 차려!’
처녀 딱지 떼는 것이 소원이긴 했지만 친척이나 다름없는 집 거실에서 일을 치를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끙끙거리며 몸을 좌우로 트는 그녀를 그가 온몸으로 눌러왔다. 힘이 빠진 건지, 벗어나려는 마음이 사그라진 건지, 몸조차 뜻대로 버둥거려지지 않았다. 살갗이 부대낄 때마다 열꽃이 피어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잠시 입술을 놔줄 뿐 그는 어느 한 곳도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린의 몸이 노곤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종소리까지 들려와 몽롱한 머릿속을 살살 울려댔다. 진짜로 좋아하는 상대와 키스하면 무슨 종소리 비슷한 게 들린다더니, 그녀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걸까? 지금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이긴 해도 어쩌면 유민 역시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녀의 짝은 유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귀여운 유민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그려지자 린은 이 상황에서도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우리가 그렇고 그런 찐한 사이가 되도 할아버지는 겹사돈을 끝까지 반대하실까? 그럼 유민이랑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나…….’
“거, 거, 거기 누구야! 나, 나 야구 바, 방망이 들었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쩌렁쩌렁한 고함에 그녀의 엉뚱한 상상은 정지되었다. 비록 잔뜩 겁먹어 부들부들 떨리는 소리긴 했지만.
입술이 꼭 맞물려 있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린은 비몽사몽간에도 이런 낯 뜨거운 현장을 가족들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어깨를 밀어댔지만 그의 상체가 조금 들릴 뿐이었다. 밀어내는 그녀에게 화가 난 듯 그가 더욱 난폭하게 입술을 점령했다. 심지어 그의 손은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누구냐니까! 경찰 부른닷!”
겁에 질렸던 목소리가 흐릿한 린의 머리를 뚫을 만큼 우렁차지고 뚜렷해졌다. 누가 들어도 유민의 목소리였다.
‘그럼…… 지금…… 난…… 도대체…… 누구랑 뒹굴고 있는 거야!’
번쩍 눈이 떠진 린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발버둥을 쳐댔다. 주먹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얼굴을 갈기고, 무릎으로 한창 달아오른 급소를 후려쳤다. 유민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입술을 떼면서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에게 꼭 달라붙어 있던 그의 윗몸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조, 좀 있으면 우리 혀, 형들 올 거야! 목숨이 아, 아깝걸랑 빨, 빨리 도망치는 게 조, 좋을걸!”
유민이 뭔가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는지 바닥으로 물건들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남자가 짧은 비명을 뱉는 걸 보니 그중 하나에 맞은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물건에 또 맞았는지 신음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일어설 듯 몸을 일으키던 남자가 그녀의 허리에 올라타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새꺄, 너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자, 작은형이야? 휴, 난 또 누구라고……. 문이 죄다 열려 있기에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잖아. 근데, 형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일 오기로 하지 않았어?”
“몸이 안 좋아서 나 먼저 올라왔어. 그런데 집 비우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정전돼서 PC방 갔었어.”
“불이나 좀 켜봐!”
“정전 끝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갔다.
‘황홀한 키스를 나눈 남자가 김지민이라니. 첫 경험을 치를 뻔한 남자가 김지민이라니. 그녀의 허리에 올라타고 있는 남자가 김지민이라니. 밥맛 중의 밥맛, 그 김지민이라니……. 이건, 정말, 악몽 중의 악몽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