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도 붐이 한창이다. 웰빙well-being과 힐링healing이라는 두 단어는 현대인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주제다. 단적인 예로 요가를 들 수 있다. 요가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미 건강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런 요가가 사실은 인도 힌두교 브라만 사제들의 득도를 위한 수행 방법으로 생겨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까지 요가는 사제들의 전유물로서 일반 서민은 이런 수행을 행할 수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도의 고대 철학을 바탕으로 한 뉴에이지 사상은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음악, 영화뿐만 아니라 철학 사조 등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인도는 21세기 전 세계로 종교와 사상이라는 상품을 수출하고 있다.
-[제1부, chapter 2 정신세계를 수출하는 나라, p. 27-29]
힌두교가 넓게 퍼지고 민간에까지 깊게 스며들어 갈 수 있었던 배경에 힌두교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신들의 전쟁 이야기라는 점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구조, 까막눈도 이해할 수 있는 구전전승의 방법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이 대중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지역이나 계층, 시대마다 각기 다른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첨가되어 스토리를 자기화하는 작업을 통해 대중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전해져 왔지만 더 이상 외래적이지 않은 스토리는 ‘우리’의 전통을 담아내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처럼 라마야나 전통은 인도 문화의 힘, 곧 그 다양성과 풍부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인도가 자랑하는 문화적 소프트 파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chapter 8 라마야나 대서사시에 얽힌 비밀, p. 100]
델리는 우리나라의 서울과 유사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이후 100년을 포함한 600년 정도定都로서의 상징성이 있는 서울과 무굴 제국 300여 년과 1911년 이후 100년을 포함한 400여 년의 인도 수도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델리는 한 왕조의 수도이자 식민지 수도로서의 슬픈 역사와 독립 국가의 수도이기도 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한 분단과 함께 수도의 지리적, 숫자적, 문화적 변화로 인해 그 기능이나 상징성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서울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온 북녘 사람들이 정착하여 이전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었고, 산업화 과정에서 타지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단지 한 지역으로서의 기능보다 작은 대한민국으로서 기능하기에 이르렀다.
델리도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 분단과 함께 찾아온 독립이기에 펀자브와 신드, 서북국경지방 등의 서파키스탄 지역에서 종교적 박해를 뚫고 피난 온 사람들이 델리에 유입되어 이전과는 사뭇 다른 좀 더 역동적이며 다양한 델리 문화를 만들었다. 1960년대 이후엔 주변 다른 지역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이주한 사람들이 델리를 ‘리틀 인디아Little India’로 기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제2부, chapter 2 서울과 닮은 델리의 현대사, p. 114-115]
잠시 여기서 인도 현대사로 넘어가 보자. 1947년 인도가 독립하고 파키스탄이 새로 건국되면서 두 국가는 새로운 국가의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완전하나마 세속주의 가치와 이념으로 탄생한 인도는 관용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강한 이미지의 아크바르 황제를 이상적 인물상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소수 종교 혹은 제2의 시민쯤으로 전락할 뻔했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무슬림들만의 국가를 탄생시킨 파키스탄으로서는 당연히 이슬람적 가치를 지키며 거대한 제국의 판도를 이룩한 절대군주 아우랑제브를 추앙의 대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매김이 인도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2부, chapter 7 무굴 제국의 이상적인 황제는 아크바르인가, 아우랑제브인가?, p. 159-160]
델리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땨Satya라는 젊은 사업가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딸만 둘이다. 그 둘째 딸이 우리 둘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아내들끼리도 통하는 게 많은 편이다. 둘째도 딸을 낳은 이 친구에게 여러 지인이 찾아와 축하해 주기도 했지만, 몇몇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떡하냐? 또 딸이네.” “괜찮아. 잘 키우면 되지.” 짧은 한마디였지만 인도의 남아선호사상이 물씬 풍기는 그 말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었다고 친구가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 친구는 딸 아이 가진 것을 신께 감사하는 깨우친 아빠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가족에게 짐을 하나 얹어 주는 것과 같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불평등이 시작된다.
-[제3부, chapter 3 인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p. 200-201]
20세기 초반, 인도가 간디의 영도하에 반영항쟁을 추구하던 시기에 암베드카르도 이에 동참하며 국민회의당 내에서 불가촉천민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힌두와 무슬림이 각기 다른 집단인 것처럼, 달리트 또한 구별된 집단임을 호소하고 실제적인 정치적 이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된 인도에서 최초로 법무부 장관이 되어 인도 초대 헌법을 기초하는 중대한 업무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힌두 상층 계급이 다수인 의회에서의 개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이처럼 달리트의 삶은 적어도 19세기 중반을 거쳐 끊임없는 반란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가 결국 실패한 개혁, 즉 미완성의 과업을 21세기 달리트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제3부, chapter 10 하층 카스트의 위대한 반란, p. 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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