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호리한 체구의 에니스가 형제들 사이로 돌진했고, 주먹이 오고 가면서 욕설과 신음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데즈먼드의 어깨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부러진 날개를 펄럭이면서 까악까악 울어댔다. 작고 털이 달린 무언가가 데즈먼드의 바짓단 아래로 질주를 했고 멕의 커틀 위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소녀는 날카롭게 비명 소리를 질렀다. 해미쉬는 우연히 한두 대 얻어맞고 비틀대긴 했지만,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무시무시할 정도로 배너, 자신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내 피오나 할멈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자그마한 주먹을 허공에 흔들면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기 시작했다.
--- p. 59
'엘서노르에 잘 오셨소. 우리 아이들은 물론 나도 부인을 환영하오.'
윌로우는 담요를 젖히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갓난아기의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일순, 윌로우의 눈빛이 싸늘한 북풍처럼 차가워졌다.
'사양하겠어요.'
갓난아기를 도로 건네주면서 윌로우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 잡아먹을 애는 벌써 다 먹어치웠으니까.'
가장자리에 모피가 장식된 외투의 옷자락을 끌면서 윌로우는 몸을 획 돌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간 다음, 배너의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배너는 어안이 벙벙해서 마차 문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이 낄낄대고 웃는 소리를 듣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배너는, 사타구니 사이로 흐르는 따뜻한 기운이 새신부가 불러일으킨 욕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강보에 싸여 방실대고 있는 갓난아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60
아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어서 '오, 아'와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배너는 딸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렇게 자그맣고, 부서질 듯이 약하고, 꿈틀거리고, 혹은 피비린내가 나는 존재는 품에 안은 일이 없었다.
배너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 피오나 할멈은 홀리스에게 아기를 빼앗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피오나 할멈의 예상은 조금 뒤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홀리스가 배너의 다리 밑에 의자를 밀어 넣는 순간, 만인에게 '영국의 자존심이자 프랑스의 공포'라고 일컬어지는 용맹한 기사, 배너 경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서 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 p.342-343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아요? 엘서노르처럼 풍족하진 못했지만 베들링튼에도 거울은 있었어요.' 윌로우는 검은 고수머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내 머리카락은 검댕이처럼 새까매요. 살결은 거칠고 까무잡잡하지요. 게다가 팔 다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다구요. 그리고 가슴은 어떤지 알아요!' 윌로우는 양 손바닥으로'너무 작아서 성질을 돋구는 도톰한 물건들'을 감쌌다. '당신도 눈이 있으면 한번 봐요!'
--- p. 171
그녀는 홀과 연결되는 넓은 석조 계단을 내려갔다. 평상시에도 지친 나그네나 취객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추위를 피해 찾아드는 벽난로였기에, 그 주변에 몸뚱이들이 잔뜩 엉켜 있는 것을 보고도 윌로우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몸뚱이들의 주인이 바로 성의 군주와 그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윌로우는 미소가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자정까지 잠들면 안되는 전투에서 패배한 모양이다. 그건 배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의 요정이 눈꺼풀에 뿌린 마법의 가루에 취해서 쓰러진 거인처럼 아이들의 중앙에 누워 있었다. 멕,마저리,그리고 컬럼은 배너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양쪽 측면에 놓인 긴 의자 위에는 에니스와 메리가 대자로 뻗어서 잠들었으며, 해미쉬와 에드워드,켈은 배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 에드워드, 켈의 귀에 입술을 들이댄채 잠이든 해미쉬. 제발 해미쉬가 야들야들하고 연한 고기를 씹어 먹는 꿈은 꾸지 말아야 할텐데. 윌로우는 켈을 위해서 기도했다.
메리 마거릿은 배너의 한쪽 팔에 안겨 있었다. 배너가 하늘 나라 혹은 프랑스에 간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배너의 더블릿 앞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절대 아무 데도 보내줄 수 없다는 듯이. 잠결에 훌쩍거리는 소녀의 몸에 배너는 강건해 보이는 팔을 방패처럼 둘렀다. 어둠이 가져올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모두 막아주겠다는 듯이.
--- p.22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