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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오디세이아

한화 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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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510쪽 | 152*223*35mm
ISBN13 9791198260598
ISBN10 119826059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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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여. 김종희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잠시 뒤로 돌려보기를 바란다.)
“종희가 이번에 즈네 학교 일등했다는 게 사실이여?” (충청도 지역 방언을 그대로 싣는다.)
“아따, 종희 녀석 대가리만 봐도 공부 잘하게 생겼지 않았나 뵈.”
“허기는 그 녀석 여기서 보통학교 다닐 때도 공부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
“아이들은 그저 대가리가 크고 봐야 하는 거여. 대가리가 크면 머리는 자연히 좋게 마련이여.”
“그렇긴 그려. 종희 녀석. 한때는 아이들이 「말 대가리」라고 놀려대더니만 그런 높은 학교에 가서도 일등을 하다니, 안 그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말 대가리가 아니라 바로 「용 대가리」였어.”
“헛허.... 하여간에 그 녀석 별호가 「대갈장군」이더니 기어이 머리통 큰 값을 하는구만 그려.”
도상(道商, 京畿道立商業學校)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종희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별나게 크기로 유명했다. 그가 이번 1학기에 학급에서 1등을 했다고 해서 ‘시름세(上德里의 속칭)’ 촌노들의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도상’은 3.1 독립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강인한 저항에 직면했던 일제(日帝)가 종전까지의 식민지 무단정치(武斷政治, Stratocracy)를 문민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를 표방하고 각 도(道)에 중학교를 하나씩 세우기로 해서 총독부가 1923년에 설립한 상업학교다.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자하문 기슭에 자리 잡은 ‘도상’은 학교의 입지 조건이 좋고 자연환경이 수려할 뿐 아니라 시설이 또한 동양 제일을 호언하리만큼 훌륭했다. 교사(敎師)는 체육교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교장 이하 전 교사가 일본인이었다. 학사 행정에 관한 한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형식상으로나마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지 않았다. 학생 선발에 있어서도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을 차별하지 않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했는데 신입생의 경우는 입학시험 때에 아예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꼭 반반씩 선발했다. 더욱이 ‘도상’ 졸업생들에게는 일본인, 조선인 구별 없이 거의 모두가 각급 관공서나 각종 금융기관에 취업이 보장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도상 입학을 지망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조선 13도에서 해마다 몰려들었다.
입시 경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져서 특히 김종희가 지원한 해에는 중학교 입시 사상 최고의 경쟁률을 보여 1937년에 무려 16대 1의 좁은 관문을 뚫고서야 합격할 수 있었다. 김종희는 지금도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의 뿌듯한 감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배달된 우편배달물을 펼치자 ‘합격(合格)’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그는 온몸이 하늘로 부웅 솟아오르는 황홀감에 휩싸였다.
“합겨억! 합격이다.” 그는 소리높여 외치며 마당 한가운데서 껑충껑충 뛰다가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빛의 속도처럼 빨랐다. 김종희의 아버지 재민(在民) 공은 오늘도 일꾼들을 거느리고 멀리 떨어진 벌판에서 사금(砂金)을 캐고 있었다.
“아버지! 합, 합...”
단숨에 달려온 종희가 숨을 몰아쉬느라고 말을 못 한다.
“아니 저아가... 왜 그랴?”
“합격했어유, 아버지.” “뭣이여?” “통지서예유.”
“허, 그거! 큰일이다. 큰일이여...”
재민 공은 학비 낼 걱정으로 금방 눈앞이 캄캄해졌다. 종희는 아버지 얼굴에 깔리는 수심의 긴 그늘을 보는 순간 불안했다.
“아버지는 내가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때 재민 공 광구에서 일하던 한 인부가 창백해진 종희의 얼굴을 보더니 은근히 한마디를 거들었다.
“아저씨. 요새는 돈 벌어서 땅에 묻는 것보다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이 훨씬 나은 세상이에유.”
“이 사람아, 내 처지에 어떻게 아이들마다 공부시킬 형편이 된데여?”
“아, 달포(한 달이 약간 넘는 기간) 전에도 철뚝 너머에 있는 논을 세 마지기나 사셨잖았나뵈유.”
“우리 집 입이 몇이라고 그려? 우리 두 늙은이 말고도 아이들이 칠 남매여...”
종희는 재민 공의 7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큰아들 종철은 서울 낙원동에 있는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현 건국대 전신)에 재학 중이었으며 셋째 종근(鍾根)이와 넷째 종환(鍾煥)이가 직산(稷山)에 있는 보통학교에 다니는 중이었고 그 밑으로 다섯째 종상(鐘商), 여섯째 종식(鍾植), 그리고 종희 밑으로 열네 살 난 딸이 하나 있었다. 종숙(鍾淑)이었다.
공부는 지금 보통학교 3학년에 다니는 셋째가 잘한다. 종희도 잘하기는 하지만 종근이만큼은 못한다. 종근이는 3학년까지 내내 반에서 1등만 해오는 데 비해서 종희의 보통학교 실력은 반에서 겨우 10등 안에 들어갈 정도다. 그래서 종희는 작년에 이미 ‘도상’ 입학시험을 한차례 치렀다가 낙방한 일이 있다. 그때 재민 공은 잘됐다 싶어서 종희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봐서 집안 형편이 좋아지면 종근이나 공부를 더 시켜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종희는 6형제 중에서도 체격이 크고 건장했으며 종근이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하느라고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종희의 반발
“종희야! 이거 너한테 맞나 한 번 져봐라.”
장에 갔던 재민 공이 새 지게를 하나 사 들고 와서 하는 말이었다.
“져보나 마나 너무 커서 지한테는 안 맞겠네유.”
“좀 큰 듯한 걸로 사 왔다. 니 키도 더 클 거 아니여?”
(아버지는 정말 날 농사꾼으로 만들 작정인가부다...)
“어여 져봐.”
“전 농사 안 질 거예유.”
종희의 이 반발은 역사적이다. 종희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지게를 졌더라면 한국의 경제발전사(史)도 내용을 달리했을 것이고 ‘한화’라는 거대 기업 집단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학교(도상)도 떨어졌는데 뭘 할거여? 밥만 먹고 집에서 그냥 빈둥빈둥 놀 거여?”
“성환에 있는 고등과(高等科)에 보내줘유.”
“고등과는 무슨 분수없는 고등과여? 높은 학교 못 들어갈 바엔 일찌감치 농사일이나 뼈에 익힐 생각 안 하고, 쯧쯧!” 
“내년에 시험 한 번 더 칠 거예유.”
“쓸데없는 소리 말어. 니 나이 시방 열다섯이여. 공부는 언제 끝내고 니 밥벌이는 언제 할거여?”
“....”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어. 아무 소리 말고 내일부터 산에 가서 집에 땔감이나 해 날라.”
“저 고등과 안 보내주면 서울 가서 돈 벌어 가지고 고학할 거예요.”
“고학?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 등 뜨습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잘하지도 못하는 공불 무슨 애로 머릴 싸매고 할려고 그려? 옛적부터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 했는데 농사일이 싫다니... 니 부대리에서 살 때 배곯던 설움 그새 다 까먹은 거여?”
종희가 보통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상덕리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종희는 부대리(富垈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

원 고향은 숯골
재민 공의 고향은 원래 아산군 음봉면(牙山郡, 陰面) 신수리(新壽里, 속칭 숯골)이었다. 숯골은 마을 이름 그대로 숯이나 구워내던 산간 벽촌이었다. 순천 김씨(順天 金氏)네 일족(一族)이 그곳에 뿌리는 내리게 된 것은 300여 년 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다. 임진왜란 때에 순직한 충주목사(忠州牧使) 김여물(金汝)의 아들이며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른 김유(金)의 권속이 병자호란 때 강화(江華)로 피난했다가 강화마저 위험에 직면하게 되어 다시 옮겨간 피난처가 바로 숯골이었다.
병자호란이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등으로 항복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 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1636년 12월 28일~1637년 2월 24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의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가 피해가 막심했다.
재민 공이 부인(吳明哲, 본관 : 海州)과 함께 부대리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서였다. 그때부터도 부대리는 마을 이름답지 않게 아주 가난한 빈촌이었다. 마을 주변에 야산이 많아서 70호가 넘는 농가 수에 비하면 농토가 너무 적은 데다가 토질까지 척박하여 소출도 시원찮은 편이었다.
그전부터도 부대리에는 한 섬지기(한 마지기의 20배, 4,000평) 땅을 자작(自作)하는 농가가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는 편했는지 모른다. 부대리 농민들은 대부분 논 열 마지기 미만의 소작(小作, 토지를 지주로부터 빌려서 경작하는 농업인)농이었다. 그래서 부대리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농한기인 겨울 한 철에는 나무 장사를 해서 좁쌀을 사다가 부족한 일년 양도를 보태 먹고 살았다. 나무 한 짐 값이라야 천안삼거리까지 이십 리 길을 지고 나가서 팔면 고작 좁쌀 한 되 값에 지나지 않은 8전에서 10전, 부대리 농민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모두 허기진 배를 안고 가파른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재민 공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겨우 천수답(天水畓, 저수지나 관개시설이 없어 오로지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던 재민 공 형제의 형편은 더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재민 공은 이재(理財)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현미(玄米) 장사를 할 줄 아는 것이다. 재민 공은 현미 장사로 겨울 한 철은 끼니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다.
현미 장사란 벼를 사다가 매통에 갈아서 현미로 만든 다음에 그 현미를 천안에 있는 미곡거래소(米穀取引所)에 내다 팔아 이익을 보는 것이다. 잘 여문 벼 한 가마니를 사다가 매갈이를 해서 현미로 내다 팔면 보통 벼 한 말이 떨어진다. 그러나 천안 미곡거래소에 내다 파는 현미 값은 잦은 시세 변동과 함께 그 등락 폭이 심했다. 당시의 현미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가(米價)의 근본적인 대세는 그 해의 작황(作況)이 좌우했지만 때때로 변동하는 천안 일원의 미곡 시세는 중부권의 미곡 대일(對日) 수출 창구인 인천(仁川) 미곡거래소의 영향을 받았다. 인천 미곡거래소에 현미 집하량이 많으면 천안 현미값이 떨어지고 반대로 집하량이 달리면 값이 오르게 마련이다. 그 무렵의 현미 사업은 다소의 위험 부담을 수반하는 일종의 투기성을 띤 사업이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미곡 선물거래가 된다. 위험 부담이 큰 비즈니스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할 때 미곡 선물거래에 뛰어든 일이 있었다. 하지만 재민 공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손해 보는 일 없이 현미 장사를 해서 남들이 굶는 보릿고개에서도 죽은 끓일 수가 있었다.
그렇게 가난한 부대리의 농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큰 자랑이 하나 있었다. 다른 마을에 없는 학교(學校)가 있었다. 물론 천안이나 직산에 있는 6년제 정규 보통학교는 아니다. 부대리 성공회(聖公會)가 설립한 4년제 부설 사립학교다. 부대리 농민들은 자식들이 그 학교에서 신학문(新學問)을 배운다는 데 큰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영국 성공회의 신명학교(新明學校)
성공회가 부대리에 부설학교인 신명학교를 개설한 것은 1912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합병된 지 2년 후의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가 암흑기로 접어드는 초기였다.
잉글랜드 성공회(Church of England)는 잉글랜드의 국교로 헨리 8세가 1532년에서 1536년 사이 로마 가톨릭을 벗어난 독자적인 성공회를 표방하며 성립되었다. 영국인 선교사 알프레드 세실 쿠퍼(Alfred Cecil Cooper, 한국명 具世實)가 천안군 북일면(北一面) 부대리 성공회 사제로 부임하고 나서 2년째 되던 해이다.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이며 인도 총독의 아들이기도 한 쿠퍼 신부가 약관 26세 나이로 한국에 파송되어 온 것은 1908년, 그는 2년 후에 부대리 성공회 사제로 부임해서 성당 신축을 마치고 곧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성당 부지 빈터에 흙벽돌을 찍어 30평짜리 교실 두 칸을 세우고 마을 아이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후 신명학교는 1914년에 직산군과 목천면이 천안군으로 합병되면서 천안군 북일면 부대리가 천안면에 편입되자 학교 이름을 북일사립학교(北一私立學校)로 개칭하고 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북일학교 출신 중에는 그동안 면서기, 주재소 순사 등 각 지방 관서에서 입신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대리 농민들의 대부분은 자식들을 공립 보통학교에 취학시킬 형편이 못 되었다. 북일사립학교는 월사금(月謝金)은 5전인데 비해서 공립학교는 10전을 내야 했다. 종희도 북일사립학교를 2학년까지 다녔다. 그 후 1년을 쉬었다가 1931년에 다시 직산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되었다.
그의 북일사립학교 2학년 2학기 말인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종희는 영문도 모르고 식구들과 함께 부대리를 떴다. 재민 공이 그해 겨울 현미 장사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 추수 후에 벼를 사 놓으면 으레 시일이 지나면서 조금씩은 벼 값이 오르기 마련이었는데 그해 겨울에는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벼 값이 자꾸만 떨어지는 것이었다. 실은 그해에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벼농사가 대풍을 이룬 때문이었다. 그 시기만 해도 산업 정보가 발달하지 못한 때이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정보에 어두운 재민 공의 경우에는 한국과 일본의 벼농사가 대풍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오직 ‘경험’ 한 가지만 가지고 현미 장사를 해 오는 터에 하필이면 그해 따라 추수가 끝나자마자 변돈(邊錢, 사채)까지 내가며 많은 양의 벼를 사서 비축해 놓았던 것이다.
그동안 재민 공이 현미 장사를 해서 재미를 보아온 것은 사실이다. 남들은 5전 하는 월사금도 없어서 아이들을 북일사립학교에도 취학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는데 재민 공은 현미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큰아들 종철이를 천안보통학교에 보내면서 둘째 종희까지 북일사립학교에 보내고도 천수답이라고는 하지만 산 다랑이의 논배미도 서너 마지기 장만할 수 있었다.

부대리를 떠나 천안으로 이주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재민 공은 그해 현미 장사에서 큰 손해를 보는 바람에 빚을 갚기 위해 재산을 정리하고 천안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재민 공으로서는 조선의 미곡 값이 인천 미곡거래소에서 멀리로는 일본 동경의 미곡거래소로 연결되는 미곡 선물거래의 흐름을 파악하고 대응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재민 공은 부인과 아이들 다섯(종식, 종숙 출생 전)을 앞세우고 천안으로 와 천안 역사 앞에서 호주머니에 있는 편지봉투를 꺼내서 펼쳐 보았다. 재민 공이 천안으로 온 것도 이 편지봉투 하나를 믿고서였다. 봉투에 적힌 주소는 대전읍 영전 2정목(大田邑 榮田 2町目) 269번지, 발신인은 윤원유(尹元有). 윤원유는 대전 상업학교에서 사정(使丁)으로 근무하고 있는 재민 공의 매형이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발품을 팔더라도 의지할 곳은 있어야겠기에 매형이 살고 있는 대전으로 온 것이다.
대전에 와 보니 막상 매형네 살림도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어서 기댈 만한 처지는 못 되었다.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재민 공의 대전 생활은 문자 그대로 고생의 연속이었다. 당장은 조석으로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니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끼니 걱정이라도 면하려면 아이들이라도 어서 커서 제 입벌이를 해야 한다. 그렇게 각박한 하루하루의 대전 생활이 1년이 지나던 어느 날 당질(堂姪) 종호(鍾鎬)가 불쑥 찾아왔다.
“아니, 니가 웬일이여?”
종호는 이제까지 부대리에서 보아 온 핫바지 저고리 차림의 촌뜨기가 아니었다. 아래위를 새 양복으로 쭉 빼입은 당질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재민 공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얼마나 고생이 되셔유, 아저씨?”
“내야 그냥저냥 지낸다마는 느들은 어떻게 지냈어?”
“시방은 괜찮구만유.” “그려?”
“실은 아저씨를 모시려 왔어유.”
“날 모시러 오다니...?”
“아버지가 모시고 오랬구만유.”
“뭐여?”
“참말이예유.”
“느 아버지는 시방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여?”

종호의 아버지 봉서(奉瑞) 공과 재민 공은 사촌 간이다. 그들은 촌수는 사촌 간이면서도 친형제나 진배없었다. 6살에 조실부모한 봉서 공은 큰아버지 김경삼 옹(金景三 翁), 재민 공 부친(父親) 집에서 재민 공과 함께 자랐다. 나이는 재민 공이 두 살 위였지만 재민 공은 어려서부터 봉서 공을 끔찍하게 친동생 이상으로 챙겼다. 재민 공은 성격이 차분하고 내성적인 반면에 봉서 공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하기 때문에 같이 장난을 치고 놀다가도 재민 공이 다치기 일쑤였고 집안의 잔살림 같은 것도 봉서 공이 깨뜨리거나 못 쓰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재민 공은 으레 봉서 공을 감싸기 위해 그 잘못을 혼자서 뒤집어쓰고 종아리를 맞곤 했다.
봉서 공이 숯골 큰집을 빠져나간 것은 그의 나이 열두 살 되던 해였다. 재민 공이 숯골에서 떠난 것도 사실은 봉서 공의 영향이 컸다. 봉서 공은 열두 살부터 천안에 있는 천직산 사금광(砂金鑛)에서 일을 했다. 숯골 벽촌에서 팥밭이나 일구고 숯이나 굽는 일보다는 사금광에서 품을 파는 수입이 더 좋았다. 그래서 봉서 공이 사촌 형인 재민 공을 천안으로 불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천직산 금광은 매장량이 줄어드는 바람에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몇 해 후 사금광이 폐광되자 재민 공은 부대리에 다시 정착하게 되었고 봉서 공은 다시 다른 금광을 찾아서 천안을 떠났다.
그 후 봉서 공은 여러 금광을 전전하다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驪州君, 北內面)에 있는 석금광(石金)에서 십장(什長)으로 일하게 되었다. 십장은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나 잡부들을 감독하고 지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서당 문전에 발을 들여놓아 본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부적인 통솔력이 있어서 비록 일본인 광부라 할지라도 일단 자기 휘하에 들어오면 꼼짝 못 하게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으며 특히 교제술에 능해서 가깝게 지내는 광업계의 유력 인사들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오랜 광부 생활을 하는 동안 봉서 공은 차츰 ‘광업권(業權)’이라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단한 진전이었다. 광업권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광물을 채굴, 취득할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광맥을 발견하는 사람이 총독부에 광업권 설정을 출원하여 허가만 받아내면 권리로 인정되는 것이다. 광업권은 곧 물권(物權)이기 때문에 팔 수도 있는 것이고 광업권을 가진 사람은 광주(主)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부에서 주인으로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광업권만 가지고 있으면 돈을 대고 광산을 같이 개발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봉서 공은 나이 사십이 지나면서부터는 광부 생활을 그만두고 금맥(金脈)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금노다지’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광맥을 찾아 헤매는 동안 봉서 공은 부대리에서 별로 멀지 않은 성거면 신월리(聖居面 新月里)에서 금맥을 발견하고 광업권을 출원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재민 공을 만났다.
“여러 해 고생하고 다니더만 그래도 고생 끝에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여.”
“늘 성님이 걱정해 준 덕이지요.”
“그동안 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굶어 죽다니? 누구 말이여?”
봉서 공은 여주에 있는 가족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 한 번 들여다보곤 여직 안 가봤으니까요.”
“저런, 쯧쯧!”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칠까요.”
그래서 재민 공이 여주에 있는 봉서 공 가족들을 부대리로 데려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래윗집에서 살게 되었다.

아! 사금(砂金) 이구나
봉서 공은 인천의 사금광을 하루속히 채광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천안역에서 열차 편으로 상경길에 올랐다. 천안역을 떠난 열차가 직산을 지나서 상덕리 앞을 지날 때였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봉서 공 얼굴에 흠칫 경련이 일었다.
“아니, 저 사람들이...?”
그는 놀란 듯이 열려진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10여 명의 일꾼들이 철도 연변의 논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사금이구나!) 봉서 공은 대번에 그들이 사금을 캐고 있다는 것을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전부터도 상덕천(上德川) 일대는 장마가 지고 나면 사금이 난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어온 적이 있는 봉서 공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봉서 공은 이미 출원해 놓은 인천의 사금 광업권 문제도 있고 해서 총독부 공광국(工局) 광업과에 들렀다가 천안군 직산면 상덕리 일대에는 아무 광업권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현재 상덕리에서 사금을 캐고 있는 것은 도굴꾼들에 의한 불법채굴(不法採掘)임이 틀림없다. 총독부 광업령에 의하면 ‘모든 미채굴 광물은 광업권을 설정하지 아니하고는 채굴할 수 없다’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위반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병과(倂科)할 수 있다’는 벌칙 규정을 두어 일체의 도굴 행위를 엄단하고 있다.
봉서 공은 다시 천안으로 내려와서 상덕리 일대의 사금 매장량을 조사한 다음 광업권 출원에 필요한 ‘광물 채굴 구역도’ 및 ‘광상(床)에 관한 설명서’ 등을 작성하여 총독부에 제출했다. 상덕리의 사금 매장량은 인천 해안의 매장량에 비하면 ‘노다지’ 바로 그것이었다.
봉서 공이 인천의 광업권을 2천4백 원에 팔고 그 돈을 밑천 삼아 상덕리 사금광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부터였다. 재민, 봉서 공 일가의 운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채광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못 가서 떠도는 소문은 상덕리 사금광에서 캐내는 금이 하루에 한 놋대야씩이라고 했다. 소문이 약간 과장되기는 했지만, 상덕리 사금광은 꽤나 좋은 금광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다시 재민 공이 당질 종호와 만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아니 그라면 느 아부지가 시방 시름새(상덕리)에서 사금광을 하고 있다는 거여?”
“참말이래도 그러네유.”
재민 공은 사촌이 금광을 한다는 말을 듣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허기사 금광도 금광 나름이지만... 금광, 금광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여?”
“아녜유, 아저씨. 동네 사람들이 그러는데 시름새 땅은 1년 후에 다 우리 땅 될 거래요.”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오죽 좋을 거여?”
“하여간에 밤차로 올라가셔유, 아저씨. 아버지가 꼭 모시고 오라고 했어유.”
재민 공으로서는 금광을 시작해서 잘살게 되었다는 사촌의 호의가 고마웠다. 대전에서의 날품팔이 생활을 끝내고 상덕리로 올라온 재민 공은 사촌이 새로 지은 널따란 기와집에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대리에서 살 때처럼 아래윗집에서 살게 되었다. 재민 공이 ‘노다지’에 미친 떠돌이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사촌의 덕을 볼 줄이야! 그래서 옛사람들이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는지 모른다.
대전에서 사는 동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종희가 직산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되고 종철이가 다시 천안보통학교 5학년에 진학하게 된 것은 바로 그해 여름이었다. 종희로서는 직산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상덕리에서 직산학교까지는 가까운 십 리 길이다. 통학거리는 부대리에서 북일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먼 편이지만 학교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직산학교가 더 좋다. 북일학교는 교실도 두 칸뿐이고 학생 수도 4, 50명밖에 안 되지만 직산학교는 교실이 강당까지 합해서 열다섯 칸이나 되고 학생 수도 한 학급에 보통 60명씩,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두 학급씩 있어서 7백 명이 넘는다.
직산보통학교는 이미 21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로서 도내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학교이며 특히 직산(稷山)은 위례성(慰禮城)이라고 해서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하하여 백제(百濟)를 개국하면서 도읍지로 정한 유서 깊은 곳이다. 직산은 또 정유재란(선조 30년, 1597년) 때 그 지방 의병(義兵)들이 명나라 장수들과 함께 천안으로 진격해 오는 왜군의 선봉장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진을 격퇴시킨 전승지(戰勝地)이기도 하다. 그때의 직산 의병들의 굳센 기상은 직산 남산(南山) 위의 암석이 되어 장엄한 연봉을 이루고 오늘도 직산 땅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직산 사람들은 남산 위의 바위 봉우리들을 의장봉(義將峰)이라고 부른다.
김종희는 직산학교 교정에서 건너다보이는 남산의 의장봉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었다. 그는 항상 의병대장이 되어 구름 같이 쳐들어오는 왜병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김종희도 이제는 부대리 시절의 가난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점심밥을 못 싸 오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게 되었다.
사금을 캐기 시작한 지 불과 1년 만에 봉서 공은 도내(道內)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되었으며 천안 일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를 가리켜 ‘광주(主) 양반’이라고 존칭을 붙여 불렀다.
봉서 공은 돈도 억수로 벌었지만, 인심도 후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일찍부터 객지로 떠돌며 온갖 풍상을 겪어온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잘 헤아릴 줄 알았으며 특히 못 사는 일가친척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고향인 숯골에서 고생하는 순천 김씨 10여 가구를 상덕리로 이주시켜 주고 그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재민 공에 대한 그의 애정이 특별했을 것은 당연하다.
재민 공에게는 사금광의 한 광구(鑛區)를 따로 떼어주고 물주를 붙여 자영하게 해주었으며 종철이가 천안보통학교를 졸업하자 김복산(金福山: 봉서 공의 삼종)과 함께 서울에 있는 협성실업학교(協成實業學校, 서울 낙원동 소재, 현 건국대학교 전신) 입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협성학교는 1908년 서북인들이 서울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에 세운 학교다. 당시 서울로 유학을 오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다.
재민 공은 사금광을 자영해서 버는 돈으로 농토를 장만해 나갔다. 사금은 무진장 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덕리 사금을 캐내기 시작한 지 5년, 계속해서 지금처럼 캐낸다면 4년 안에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재민 공으로서는 사금광이 폐광되기 이전에 단 한 뙈기의 농토라도 더 늘려야 할 처지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멀리하는 길은 오직 보다 많은 농토를 장만해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었다. 가장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동안 재민 공의 농토는 붓 들논 상답만 해도 이미 5천 평이 넘는다. 5천 평이면 한 섬지기 하고도 닷 마지기다. 그만해도 부대리에서 천수답 닷 마지기를 소작하던 때를 생각하면 백석지기도 부러운 게 없지만 앞으로 6형제나 되는 여러 아들을 다 결혼시켜서 살림을 내 줄 생각을 하면 아직 만족할 단계는 아니었다.
--- 「천안군(天安郡) 부대리(富垈里)의 가난한 집 김종희(金鍾喜) 소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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