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할아버지는 시계공이었다. “나는 아직도 시계공이야.” 할아버지가 투덜댔다. 할아버지가 마을의 시계공이어서 빌라베르가 시계처럼 돌아간다는 말을 좋아했다. 나는 할아버지 말에 동의한다. 할아버지 말이 맞다. 그런데 궁금하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빌라베르를 떠나 우리와 함께 사는데, 시골 마을이 다섯 시여야 할 때 정말 다섯 시인지, 아니면 일 분 일 분 시간이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할아버지가 웃었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매일매일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할아버지가 통화할 때면 엄마와 할머니는 긴장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었다. 나도 무척 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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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라, 잔. 여기는 우르헬 거리야.” 할아버지가 표지판 아래 멈춰서 표지판을 가리켰다. 우리는 잠시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이제 타마릿 거리로 가자. 보이지?”
“할아버지, 이제 나무들은 안 봐요?”
“나무들도 봐야지.”
그리고 우리는 말 없이 집까지 걸어왔다. 할아버지는 나무들과 거리의 표지판을 바라보았고,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드리운 그림을 밟았다. 할아버지가 구두를 질질 끌며 걸어서 그림자가 구두 바닥에 달라붙어서 영원히 끌고 다니게 될까봐 두려웠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우리가 바라보지 않아서 나뭇가지들은 슬프게 춤을 추었다. 집에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멍한 눈빛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잔, 내일은 나무들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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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저녁을 먹은 다음 어른들은 나에게 이를 닦으라고 하고 주방 문을 닫았다. 거울을 보고 칫솔질을 하면서 나는 아빠와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안 들렸다. 만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닦는다면 주방에서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학교에 오고 할머니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건 좋았다. 그러나 이를 닦는 건 우리 셋이 살았던, 주방이 조용했던 때가 좋았다. 수도를 틀었다. 물줄기가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 거울 속의 아이는 더는 내가 아니었다. 아직 내 것인 내 손이 수도를 잠그고 이상하리만치 서둘러 불을 껐다. 이제 더는 어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주방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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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으면서 나무도, 거리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림자가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돼요.”
이 말을 할 때까지 몇 걸음이나 걸어야 했던가!
할아버지는 앞을 바라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O는 그림자일까?
할아버지의 질질 끄는 걸음걸이는 할아버지의 심장 뛰는 소리를 나에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우리 둘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제 우리 둘은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한 한 조안 할아버지의 발걸음에 맞추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시계를 갖고 있었으니까. 나는 할아버지처럼 숨을 쉬고 할아버지처럼 걸음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어깨에, 나는 배 속에 우리의 O를 짊어진 채. 우리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새로운 그림자로 거리를 물들였다.
--- p.79
나는 숙제가 있다고 하고 내 방에 틀어박혔다. 수학 공책을 폈다. 내가 전에 썼던 것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종이를 찢어서 공을 만들었다. 또 다른 ‘O’였다. 휴지통 입구도 마찬가지였다. 방은 ‘O’로 가득 차 있었다. 나에게 없는 ‘O’다.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할아버지의 ‘O’를 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원했다. 두 기억을 간직한 할아버지를. 우리의 대화를 영원히 간직하기를 원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주방에 틀어박히지 않고 할아버지가 계속 뻐꾸기시계를 수리하기를 원했다. 할머니의 향수 구름이 언제나 향기롭기를 원했다. 우리 부모님이 언제나 왕과 왕비이기를, 그래서 우리의 왕관을 모두가 간직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의 목록을 작성했다. 읽어보면서 더 많은 것이 떠올랐다. 바둑판무늬의 종이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쓰라고 초대했다. 모든 것을 쓰고 나서 ‘조안’이라고 썼다. 또 ‘O’다. 볼펜으로 그 위에 세게 다시 써서 종이에 구멍이 났다. 다음 장들에 수많은 ‘O’가 새겨졌다. 이 ‘O’는 내것이 될 것이다. 더는 구멍을 뚫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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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제가 골키퍼를 했는데요…….”
“골키퍼라고? 이런! 앉아보렴. 여기 앉아서 내가 바느질하는 동안 그 이야기를 좀 해다오.”
그래서 할머니가 바느질하는 동안 나는 골대 아래에서 공을 기다리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면서 공이 오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어느 쪽으로 공이 올지, 위에서 올지 아니면 아래로 올지, 오른쪽이 나 왼쪽에서 올지 알아맞히는 것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공이 가까이 다가오면 절묘한 순간에 날아올라서 공을 잡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공을 뚫어져라 바라봐서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인다고. 공을 잡으려고 바닥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에 바지나 셔츠 팔꿈치에 수없이 구멍이 났다. 할머니는 바늘과 실을 움직이면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바지 구멍에서, 할머니의 손과 골무에서, 그리고 침묵 속에서, 구멍을 사라지게 하려고 바느질을 반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거대한 바늘로 골대를 바느질해서 실로 공을 잡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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