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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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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428g | 124*188*25mm
ISBN13 9791190234788
ISBN10 1190234785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3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밖을 돌아다니며 그 편지에 대해 생각했다. 여태껏 받은 거절 편지 중 가장 길었다. 보통은 ‘죄송하지만 출간할 수준이 아닙니다.’ 혹은 ‘안타깝게도 완성도가 높지 않습니다.’ 등 짤막하게 적혀 있다. 아예 지정된 거절 문구를 출력해서 보내 주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런데 이번 편지는 진짜, 그 어떤 것보다 길었다. 내 원고 《하숙집 50곳 탐방기》를 거절하는 편지다.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다.
--- p.33

테이블의 커다란 와인병에 술이 좀 남았기를 바라며 내 방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한다. 나는 특정 인간 군상의 일대기를 너무나 잘 보여 주는 존재 아닌가. 음흉함, 비현실적인 망상, 억압된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 말이다.
--- p.46

난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지옥을 거쳐 왔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또 있을 거라 믿으며 호흡마다 웃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아주 단조로운 것들을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칼을 들고 비명을 지르는 나환자는 없다. 토사물을 쏟아 내는 멍청이나 진을 마시고 취한 여자애들처럼 살게 내버려 두지 말기를. 오늘은 창문을 부수고 E. 파워 빅스를 들을까 한다. 당신의 핑계는 뭐지?
--- p.62

고통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빈곤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그보다 먼저다. 그를 만드는 건 전적으로 운이다. (속된 말로) 행운을 가졌다면 그는 나쁜 예술가가 된다. 불운을 가졌다면 좋은 예술가가 된다. 관여하는 본질과 관계가 있다.
--- p.64

변덕은 지식의 수준을 높이는 운명이다.
--- p.71

우리의 예술은 우리의 고통을 이성으로 바꾸는 행위다. 우리는 뒤틀어진 마음, 점토 부스러기의 포상 같은 존재이며, 바보 같은 어둠 속 바보 같은 테이블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세상은 시라는 가느다란 바퀴살이 달린 능욕당한 바퀴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 p.74

옛날에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고 굶주렸고 아무도 내 글을 출간해 주지 않아서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낭비했다. 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에 앉는 것이 가장 좋았다. 햇살이 목과 뒤통수와 손에 닿으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아 붉은색, 주황색, 초록색, 파란색 표지 일색으로 꽂혀 있는 엉터리 같은 책들을 봐도 괜찮았다. 햇살이 목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졸면서 꿈을 꾸면서 월세, 먹을 것, 미국 그리고 책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천재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솔직히 난 어떤 부류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 p.81

어제 내 우편함에 좀 문학적이라는 명성이 있는 잡지가 들어왔다. 그 안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영어 강사이자 교수이며 시인인 사람의 긴 비평이 실렸는데 그는 분명 글을 아주 못 쓰고 영혼 없이 끼적인다. 아무것도 아닌 걸 엄청 대단하게 쓴 데다 그의 시 대다수가 ‘유기적 문제’ 이론과 이미 죽고 시든 용어를 다뤄서 머리를 오랫동안 긁적거려야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오래 긁적이면 심지어 크리켓도 뭔가 말을 하는 것 같고, 그 점에 대해 누구나 헛소리를 잔뜩 지껄일 수 있다. 난 여길 지나는 누군가에게 살짝 문학적인 이 잡지를 줘 버렸다(똥 닦는 휴지로 쓰기엔 종이가 너무 딱딱해서). 안 그랬으면 좀 더 정확히 언급했을 것이다. 날 용서하길. 그런데 영어 강사이자 시인이자 철학자가 쓴 이 긴 사랑과 두려움의 조각 속에 그가 강의 중에 내뱉은 아주 사람 같은 말이 언급되어 있었다.
--- p.94

술에 취한 사람이 미쳐 날뛰고 공격적이라면 자기 집에 가두는 방법을 찾아서 그 사람이 화장실을 쓰거나 뉴헤이븐의 숙모에게 전화 걸도록 해 줘야 한다. 그 편이 감옥보다 낫다. 법정은 잊어버려라. 남아도는 판사는 길거리나 뭐 그런 데서 구멍 메우는 일을 시키면 되니까. 감옥이 전혀 필요 없는 날이 떡하니 올 거라 믿는다. 모든 사람이 상식에서 벗어나 동료를 해치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일을 스스로 거절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물론 나뭇더미에는 늘 골칫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골칫거리는 이해가 처벌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차츰 줄어들 것이다.
--- p.119

어느 날 제인과 함께 너무 취해서 그녀와 소파에 있다가 굴러떨어졌고, 그 날씬한 발목과 높은 뒤꿈치, 완벽한 종아리, 완벽한 무릎 그리고 그렇게 앉아 있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녀보다 두 배를 더 마신 탓에 소파에서 떨어진 거였다. 난 등을 대고 누워 다리를 올려다보며 불후의 명대사를 남겼다.
“자기, 난 천잰데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아.”
그리고 그녀가 불후의 명대사를 쳤다.
“아, 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요, 이 멍청이!”
--- p.176

어느 날 존 브라이언이 지하신문인 《오픈 시티》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칼럼에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가면을 쓰고 단편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가까이 썼다. 이기든 지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경마가 끝나면 여섯 개들이 맥주팩 서너 개를 뜯고 베토벤과 바흐를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말러를 들으며 칼럼을 썼다. 내가 건넨 원고는 브라이언이 모두 인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모두가 천재로 대접해서 난 그런 척을 하고 그런 글을 써야 했다. 어렵진 않았다. 천재가 되고 싶으면 유일한 사람이 되면 된다.
--- p.186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작가, 예술가, 창작자는 야망 때문에 자기 앞길을 막는 사람을 딴 곳으로 보낼 수도 있으니 그들에게서 떨어지자는 것이었다. 결국 훌륭한 작가는 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 살고 글을 쓰는 것. 그거면 끝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누가 알아주기까지 오롯이 혼자 사는 게 가능하고, 결국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다. 또한 며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며칠 밤낮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가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온다. 물론 여자도 상관없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여자는 분명 영혼을 갉아먹는 존재다.
--- p.201

일이 날 죽였다. 10년 동안 견뎌 왔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데 정신적으로 분개했다. 그리고 11년째 되는 날 몸이 죽기 시작했다. 난 안정적으로 죽느니 맨발로 사회 밑바닥에 서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는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나이 오십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문제를 떠안은 채 그만두었다. 이상하게도 그 행동이 대다수의 동료 직장인을 화나게 했다. 그들은 나 혼자 그만두는 것보다 같이 죽길 바랐던 것이다.
--- p.215

내게 타자기가 있지만 일감은 없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20일 동안 날마다 위스키를 파인트잔으로 마시며 소설을 썼다. 블랙스패로프레스가 소설 《우체국》을 받아주었다. 두세 챕터를 잡지사에 단편으로 팔기도 했다. 낯설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 pp.216~217

“부코스키 씨, 나는 당신처럼 글을 쓸 수 있지만 당신은 나처럼 글을 쓸 수 없어요.”
그에게는 오만함이 필요한 것 같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나처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재는 완전한 것을 단순하게 말하거나 단순한 것을 더 단순한 방식으로 말하는 능력이 있다. 아, 그런데 비주류 작가가 어느 쪽인지 알고 싶다면, 책이 나왔을 때 스스로 파티를 열거나 누구더러 자기를 위해 파티를 열어 달라고 하는 쪽이 비주류다.
--- p.228

방금 녹은 버터를 바른 새끼 문어를 먹어치웠는데, 그러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동자가 여전히 8월의 장대비처럼 정신없고 미친 듯 보였다. 라흐마니노프를 듣지 않고 버터랑 문어를 먹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특별한 소스가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시민으로서 햄버거와 록 음악만 고수해야겠다. 생각은 섹스보다 위험하다. 훌륭한 미국 시민은 생각하지 않는다.
--- pp.235~236

난 경마장에서 나의 큰 단점을 발견했다. 가끔은 내가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밖에서 보면 내가 진짜 못하는 걸 깨닫는다. 또한 배우다 만 지식은 지식이 전혀 없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중략) 아, 맞다. 이만 마무리하기에 앞서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은 마지막 경주에서 우승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경마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경마장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가겠다면 관중들의 편견과 개념을 무시하고 단순한 이성을 지녀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럼 행운을 빈다.
--- pp.281~282

꿈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딘가에 있다. 어떤 때는 그랬다. 모두 기분이 좋아서 사방이 다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거기 있고 마침내 모두가 아름답고 웅장하고 즐겁고 매 순간이 반짝이고 빛나고 낭비되지 않는. 정말로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멈춘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느낀 듯했다. 모든 대화가 멈췄다. 그렇게. 한 번에. 우리는 가만히 쓸모없이 조용히 앉았다. 조용한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이 아니라 마치 속았다는 기분이다. 에너지가 다 떨어졌다. 운도 다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벌거벗은 채 갇혔다.
--- p.317

난 결혼을 했고 그만두었다. 수백 개의 자잘한 잡지에 내 시를 실었지만 그건 다른 누구와 다를 바 없었고, 엉덩이를 닦거나 수도꼭지가 새서 나사받이를 교체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었다. 전쟁이 났고 시간이 흘렀고 미친 여자친구와 같이 미치고 쓸모없는 일자리를 전전했다. 20~30년을 허비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간단히 정리하자면 쉽다. 그 시간들은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난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도시의 괴물이 되었다. 교수가 날 집에 초대했고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또 마시며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인 예술과 시에 대해 토론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그릇장을 박살 냈는데 어찌된 건지 그 일 때문에 내가 천재로 여겨졌다. 덕분에 지하신문의 칼럼을 맡았다. 그리고 난 존 팬트를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다른 곳에 놔두었을 뿐이다.
--- pp.347~348

‘말’을 좀 조심해 달라는 요청에 그렇게 해 보기로 했다. 그건 핑계다. 아내가 아래층에서 말동무를 해 주고 있다. 그들은 다 괜찮다. 아마도. 아무튼 난 이리 올라와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난 작가다. 술을 마셔야 한다면 타자기 옆에서 마시는 게 더 좋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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