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에 자리한 ‘마의 산’ 그 높고 험한 깊은 곳.
‘그것’은 조금 오래 굶었다. 2년 전에 작위를 물려받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마수 토벌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자였다. 사냥꾼과 용병들이 산을 드나든 결과, 마수와 동물의 개체 수가 급감했다. 그 때문에 ‘그것’은 오랜 시간 굶주렸다.
세 달 전쯤 썩어 가는 과일을 발견해 조금 흡수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것’은 지쳐서 잠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일어난 이유는 날카롭게 제 감각을 찔러 오는 위험 때문이었다. 산의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에 흡수했던 파랑새로 의태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건 아주 옳은 선택이었다. 얼마 후, ‘그것’이 머물던 곳까지 인간들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무당벌레로 변해서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갑주들이 저 멀리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인간들은 번개처럼 거대한 산맥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숨죽인 채,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이고 몇 년이고 숨어 지내는 것은 ‘그것’들의 특기였다.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조우한 것은…….
“…….”
죽어 가는 생물이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인간이었다. 부서지고 찢어진 신체는 절벽 아래의 바위 무덤, 그중 가장 큰 바위에 걸쳐져 있었다.
하얀 꽃 한 송이를 가지고 놀던 ‘그것’은 여자를 발견하고 바위 무덤에 다가갔다. 여자는 봄에 막 싹트는 어린잎과 비슷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느리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려지는 눈빛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렸다. 살아 있는 것을 먹는 건 유일한 금기였다. 쓸리고 부서지고 뒤틀리고 베인 상처로부터 바위는 점점 피로 젖어 갔다.
‘이 인간은, 곧 죽는다.’
‘그것’은 이런 장면을 제법 많이 보아 왔다. 높은 절벽은 인간을 단번에 죽여 주는 자비로움이 없었다. 어떨 때는 노인, 어떨 때는 건장한 젊은 남자, 어떨 때는 길을 잃은 아이.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찌르고, 입에서 피를 토하는 중에도 그들은 두려워했다. 눈앞에 떠도는 그 새카만 덩어리를 무서워했다. 인간들은 기어서라도 도망갔다. 비명을 지르고 돌을 던져서라도 ‘그것’을 쫓아내려 했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아닌 미지의 생물에 대해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이런 눈을 한 적 없었다. ‘그것’은 이런 눈동자를 처음 보았다. 아주 투명하고 예쁜 구슬 같은 눈이었다. 인간들이 흔히들 이런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 같은 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 또한 ‘그것’을 관찰하듯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
검은 머리의 인간은 ‘그것’을 불렀다. 바람이 색색 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것’은 조금 주춤거리다가, 평소보다 빨리 움직여 그녀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섰다. 인간은 겁도 없이 ‘그것’을 덥석 잡았고 ‘그것’은 살아생전 처음 놀랐다. 그녀 또한 놀랐다.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검은 연기는 마른 모래, 마른 나무처럼 익숙한 듯 생경한 감촉이었다. 부서지는 입자가 그녀의 손안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부는 붙잡을 수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그것’은 곤란했다. 인간의 언어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치료해 줄 수단이 없었다.
검은 형체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대류하는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은 곧 어린 여자아이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고 검은 부분이 점점 사라지며 이윽고 완벽한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몇 년 전 흡수한 어린아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잡고 있던 부분 또한, 아이의 팔로 변했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확장되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존재를 알고 있었다.
“너. 피 많다. 죽어. 나는. 안 돼.”
너는 죽을 것이고 자신은 도와줄 수 없다. 그녀는 아이의 뜻을 읽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한 번 감고 떴다. 맑던 눈동자에 불티 같은 것이 탁탁 튀었다. 남아 있던 두려움의 한 자락, 공포의 파편이 활활 타올랐다. 출혈로 인해 점점 멀어지는 의식과 가빠지는 숨. 그녀는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제대로 인식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닳아 가는 의식 속에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저를 먹어도 좋으니,”
아이는 이 인간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 허락을 맡고 먹은 적도 없었고 그 허락이 내려진 것도 처음이었다. 여자는 컥, 컥 하며 피를 토하더니 웃었다.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아이는 왜 그녀가 웃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떠듬떠듬 그녀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
그 깊은 숲 어딘가.
금기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