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30년 전,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이했던 조선은 전쟁이 끝난 지 채 40년도 되지 않아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자 유례없는 대기근이 들어 수십만 명이 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희한한 것은 이런 일을 겪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백성들은 이 모든 과정을 견디고 이겨냈다. 이후 세도정치로 나라꼴이 엉망일 때도, 권세가들이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재산을 수탈해 갈 때도, 백성들은 끝내 자기 삶을 살았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땅을 개간하며 농사를 지었고, 어떨 때는 참지 못해 나라님을 향해 살려달라며 죽창을 들었다. (…) 그럼 고난을 이겨낸 조선인의 후손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안타깝게도 전쟁과 기근 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처럼, 암울하고 찢어질 듯 가슴 아픈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이 바로 조선인들의 자식 세대였다. 그들이 바로 불과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혹은 증조부모 세대다. 지금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점도 바로 이때다. 즉, 눈물 나는 역사 속에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한 동지애의 결과로 ‘우리’라는 공동체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프롤로그.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본문 5~6쪽)」중에서
운명의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의 서쪽 추성문으로 들어온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은 왕후를 찾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놀랍게도 고종은 실제 이 모든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고종은 즉시 미우라 공사에게 일본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청함과 동시에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 도움을 청한다. 바로 이때 발 빠른 일본 낭인들이 왕후의 처소에 진입한다. 처소에 있던 고종은 일본 낭인들과 마주한다. 일본 낭인들은 고종의 어깨를 밀치고 조선의 궁녀들을 폭행하며 왕후를 찾았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왕후를 구하기 위해 일본 낭인을 막아섰지만, 결국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을 잘렸다. 폭행당하던 이경직이 도망가려 하자 낭인들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이경직에게 총을 쏘고 결국에는 칼로 찔러 죽인다. 이후 낭인들은 왕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궁궐의 여성은 모조리 잡아 죽이기 시작한다. (…) 아침 6시, 왕후를 찾던 일본 낭인들은 널브러져 있는 시신 중 하나가 조선의 왕후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허무하게도 흰 속옷만을 입은 상태로 조선의 왕후가 치욕스럽게 사망한 것이었다.
---「암살당한 왕후와 도망간 임금(본문 55~57쪽)」중에서
이봉창은 열아홉 살 무렵, 용산역의 말단 직원을 시작으로 빠르게 승진을 거듭했다. 이후 정식 역부를 거처 전철수, 연결수가 된다. 승진을 하면서 월급도 올랐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이봉창은 조금씩 일본인과 조선인이 다른 대우를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살아야 한다’라는 잔혹한 현실은 이봉창을 괴롭게 만든다. 이 괴리감은 그를 주색과 도박에 빠지게 했고, 곧 유흥 빚을 퇴직금으로 탕감하기 위해 사직한다. 용산역을 나온 그가 향한 곳은 의외로 일본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봉창은 (…) 천황을 보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 하필 이봉창은 한글이 일부 쓰인 편지를 품에 넣고 있었는데 검문 과정에서 이 편지가 발각됐고, 그는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유치장에 열흘간 수감됐다. 이 사건이 이봉창의 인생을 뒤엎는다. 차별로 인한 울분과 진짜 일본인이 되고픈 욕망은 곧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정리된다. 다시 오사카로 돌아온 이봉창은 상하이에 한국 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인으로서의 떳떳한 삶을 꿈꾸며 상하이로 향한다.
---「위기의 독립운동을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본문 118~119쪽)」중에서
1983년 6월 30일, 한국 전쟁 33주년이자 휴전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국에서 전파를 타게 된다. (…) 방송의 반응은 엄청났다. 진행자들은 이미 선정된 150여 명의 신청자 외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이산가족들의 사연까지 취재하기 시작했다. 방송을 위해 설치한 전화기는 쉬지 않고 울려댔고, 전화가 불통이 되자 KBS 전체 회선으로 전화가 울렸다. 전 국민의 사분의 일이 이산가족인 나라에서 어쩌면 이 난리는 예고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 특집 생방송은 준비된 1시간 30분을 훌쩍 넘은 다음 날 새벽 2시 29분경까지 이어졌고, 총 스물아홉 가족이 만남에 성공한다. (…) 시청률은 78%까지 치솟았고,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은 5일간 이어진다. 1983년 7월의 첫 주에 벌어진 이 사건은 평범한 TV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사건이었으며, 축제였다. 이 축제로 인해 전국 각지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슬픔과 기쁨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던 KBS는 이후로도 특집 생방송을 이어갔고, 이는 무려 11월 14일까지 총 138일이나 이어진다. 이 정도면 특집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의 시간이었다. 결국 138일 동안 10만여 건이 넘는 신청 중 5만여 명이 출연했고, 그중 총 10,189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인구의 사분의 일이 이산가족인 나라(본문 250~252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