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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에스테의 언덕길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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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338g | 130*188*16mm
ISBN13 9791161111322
ISBN10 116111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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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리 오랫동안 사바에게 마음을 써왔던 것일까. 아직도 20년 전 6월의 어느 날 밤 숨을 거둔 남편에 대한 기억을 그와 함께 읽었던 이 시인에게 겹쳐보려는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틀림없이 변경의 도시인 트리에스테까지 온 것이 사바를 좀 더 알고 싶은 일념에서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어쩐지 불안해하고 있다. 사바를 이해하고 싶다면 왜 그가 편집한 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를 공들여 읽는 것에 전념하지 않는 걸까. 그의 시 세계를 명확히 파악하기에는 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실제의 트리에스테를 보며 아마 거기에는 없을 시 안의 허구를 확인하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사바의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 나는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을 걸으려는 것일까.
--- p.16

당시 무엇보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동시에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비밀처럼 내게 다가온 것은, 이 어둑한 방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덮쳐 누르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장마처럼 그들의 인격 자체에까지 야금야금 스며들어 기존의 모든 해석을 완강히 거부하는 듯한 ‘가난’이었다. 나 자신이 조금씩 그 안으로 편입되어감에 따라 나는 그들이 안고 있는 그 ‘가난’이 단순히 금전적인 결핍에서가 아니라 이 가족을 차례로 덮쳤으나 살아남은 그들로부터 삶의 의욕을 빼앗아버린 불행에서 유래하는, 거의 파괴적이라고 해도 좋은 정신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 p.92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가난한 채로 노년을, 그리고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그렇게 언도한 것처럼 그들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초등학교는 나왔으나 그다음 단계로는 도저히 진학할 수 없는 자식들도 어느새 부모와 같은 밑바닥 생활에 휩쓸렸다. 그들의 체념이라고도 예민한 분노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가, 여기저기 더럽혀진 계단 입구의 하얀 벽이나 한 손에 커다란 검은색 가죽 쇼핑백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시어머니와 동년배 노파들의 뒷모습에 들러붙어 있었다.
--- p.147

난 또 누구라고, 너였구나. 문 쪽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그녀가 품에 한가득 안고 온 꽃을 털썩 테이블에 놓았다. 진보랏빛 조그만 꽃이 가득 달린 그 화초를 보고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꽃이 아닌가. 부리나케 화병을 가져오려고 옆방으로 가는 시어머니의 등을 향해 나는 소리 내어 말했다. 어머니, 어디 있었어요, 이 꽃? 나뭇잎 그늘에서 기어 나온 작고 빨간 개미가 눈 깜박할 사이에 흰 비닐 테이블보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풋내나는 식물 냄새가 주위에 확 퍼졌다.
--- p.148

그 무렵 나는 밀라노에 살고 있었다. 일본의 문학작품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나는 여전히 모국어로 글을 쓰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다만 주위에 이탈리아어만 있는 곳에서는 내 안의 일본어가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리지나 않을까,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문체를 만드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벽처럼 보였다.
--- p.242

얼핏 그리스도교에 모든 것이 묶여 있었던 듯한 이탈리아의 중세에 쓰이기는 했어도 《신곡》은 이미 말의 세계가 그것과는 별도로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 p.264

문학과 종교는 분리된 두 세계다, 라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해본다.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진흙 속에는 신앙이 오래된 연꽃 씨앗처럼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 p.266

스가 씨가 걸어온 이력에서 말하자면, 페피노와의 결혼은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스가 씨를 그런 장소에 두었다. 무척 매력적인 인텔리로서 결혼 후 불과 7년 만에 세상을 떠난 페피노는 스가 씨의 에세이에 단편적이지만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가족 이야기에는 다른 작품 이상으로 페피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이야기여서 당연한 것 이상으로, 페피노에 대한 이야기가 명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진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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