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완벽주의자적 삶을 추구했다. 물론 완벽하지 않을 바엔 차라리 포기해버리는 나약한 심성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준비하는데 있어 항상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에 내 머릿속은 언제나 여러 가지 생각들로 붐벼 멈춰 있던 적이 없었다. 그런 나였기에 나는 항상 피곤한 일상 속에서 살았다. 한국에서 대학생의 삶이란 그랬던 것 같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끝없는 걱정, 제법 괜찮은 배우자를 찾기 위한 고민,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학점에 대한 걱정, 남들에게 져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쟁의식, 날로 기울어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암울한 경제 상황, 그리고 이상한 스펙 쌓기와 피곤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시선 속에 동화되기까지…. 모든 게 완벽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불가능하니까….---p. 51, ‘아베마되기’ 중
사실 그 전날 우리 일행은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몇 번이고 들었던 인도에서의 ‘엉덩이 성추행’을 처음으로 당했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친 한 추레한 노인이 진이의 엉덩이를 만진 것이다. 진이와 우리 일행은 처음 당한 일이라 황당해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잠시 후 밀려오는 분노에 니킥(Knee-kick)을 날려 주겠노라고 열심히 그 노인을 쫓아갔지만, 미로같이 복잡한 골목 때문에 노인을 놓쳤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 꼭 니킥을 날려 주자며 굉장히 예민하게 벼르고 있던 와중에 그런 일이 바로 생긴 것이다. 물론 우리 예상과는 달리 어린아이라는 점에서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말이다.---p.84, ‘니킥을 날려 주리라’ 중
몇 시간 동안 끝이 없는 사막을 낙타 위에 앉아 하염없이 보다보니 불현듯 사색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막은 끝이 없었다. 마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인생살이처럼.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똑같이 생겼다. 저리로 가도, 이리로 가도, 뒤돌아가도. 내가 가는 곳, 그곳이 길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게 무작정 앞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돼버린 우리 삶과 닮았다는 깨달음과 슬픔이 함께 찾아왔다. 내가 곧 가는 길이 인생이지, 가는 길이 목적이 아닌데 말이다. 가다가 멈춘 곳에 머물면 되는 것을….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 것 같은 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p.97, ‘길이라는 것’ 중
잠시 후 누렁니를 환하게 드러낸 버스기사가 오른다. 밥 먹어서 기분이 좋아졌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밥을 먹어서 신났는지 버스기사가 운전대를 잡고, 뿡뿡! 빵빵! 경적을 요란하게 눌러대며 운전하기 시작한다. 너무 시끄러워 귀머거리가 될 것 같은 경적 소리였지만, 그때만큼은 자장가같이 너무 너무 마음이 안정되었다. 차에 탄 사람들은 서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그런 신호였다. 귀여운 운전기사. 인도 사람들 정 많고 다혈질이라더니 정말 눈앞에 빤히 보여 더 귀여웠다.---p.151, ‘버스 기사의 분노’ 중
나는 할아버지 몰래 소녀에게 물티슈를 한 장 쥐어 주고 버스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버스에 올라타 소녀를 바라보자, 소녀는 등 뒤로 물티슈를 숨긴 채 나를 보고 해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소녀가 물티슈를 어디에 썼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어떠랴? 꽉 막히고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몰래 내가 그 아이에게 문명을 전해줬다는 사실에 내심 행복했다. 또한 어쩌면 내가 한 행동이 인도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남자의 소유물로 대접받는 인도 여자아이에게 자존감을 전해줘,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뿌려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던 그 아이, 먼 훗날 어떻게 자랄까 궁금하다.---p.243, ‘물티슈와 소녀’ 중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살펴보면 비로소 평소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내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그 사람의 질책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많다. 소리 없이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고마운 존재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현해 본다.---p.246, ‘질책에서 얻는 감동’ 중
녀석 쪽으로 가기도 무섭고,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자니 내 자존심이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저 먼 곳을 바라보던 원숭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리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녀석이 뭔가를 결심했는지 날 바라보며 내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녀석이 움직이자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난 “원숭이님, 제발 제게 똥 폭탄은 날리지 마세요.”라는 애원의 말을 남기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앞세워 필사적으로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마다 원숭이가 지붕을 흔들고 인터넷 선을 끊어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아. 이 원숭이는 이 집을 지켜주는 고마운 신의 사자야.”라는 자기 합리화로 내 나약함을 숨겨야 했다. 짐짓 태연함을 가장했던 내 나약한 청춘아, 너도 역시 내가 사랑하는 또 다른 나로구나.
---p.259, ‘원숭이님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