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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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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8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354쪽 | 130*200mm
ISBN13 978893204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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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치는 짙은 검정 머리칼 아래 장난스러운 미소가 담긴 넓고 잘생긴 얼굴, 또 그 밑으로 낡고 바랜 청 셔츠와 바지도 최신 수상 스포츠 패션인 듯 입을 수 있는 중간 키의 단단한 몸.
배리 고먼 등장. 18세 1개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계속 이어짐. 이 친구가 바로 그것-주검-이 된 친구다. 그가 반짝이는 노란 배에서 웃는 얼굴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청바지를 들어 올렸다. 내 청바지다, 재난 중에 나와 함께 배에서 튕겨 나간.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끝의 시작.
--- p.29 「1부」중에서

그것은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우리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몇 분 만에 알게 되는 걸까? 이 사람과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그런 일이 해마다 마주치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과는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얼굴 생김새나 몸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사람의 삶의 방식도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고 그게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렇다는 걸 알게 되고 그걸로 끝이다. 그날 아침 그런 일이 일어났다.
--- p.75 「1부」중에서

“……그런데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야?”
“다 좋고 다 싫어.”
--- p.106 「2부」중에서

나는 욕실에서 15분을 보내며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몸’을 최대한 배리의 시각으로 관찰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무릎 모양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욕실 거울은 반신 사이즈밖에 안 되고 면도하기 좋은 높이에 걸려 있다. 하반신을 관찰하려면 물구나무를 서야 하는데, 그러면 특정 신체 부위들이 아름답지 않게 늘어질뿐더러 제대로 볼 만큼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도 힘들다. 아니면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서야 하고 이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다. 우리 집 욕조는 가장자리가 좁은 데다 휘어져 있어서 줄타기 곡예 같은 걸 펼쳐야 하는데, 자칫하다가는 균형을 잃고 욕조에 떨어져서 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면 다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걸친 채 넘어질 수도 있다.

아마도 머지않아 무릎을 공개해야 할 상황이 생길 게 분명하기에―생각해보니 나는 어제 이미 낄낄대는 구경꾼들 앞에서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배리 앞에서 그 일을 세 번에 걸쳐서 실행했다―, 미리 내 팔다리의 모양을 살펴보고 미래의 상황에 대비해 나를 어떤 식으로 선보여야 할지 결정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 pp.141-142 「2부」중에서

그때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지금도 내가 그런 일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만큼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때보다 강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기를 희망한다. 또 친구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좀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기이한 점 하나는, 한 번 경험한다고 다음번에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경험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변화한다. 하지만 매번의 새로운 경험은 예전의 일들만큼이나 대처하기 어렵다.
--- p.154 「2부」중에서

“약속해.” 그가 말했다.
“약속이라면―”
“내가 먼저 죽으면 내 무덤 위에서 춤을 추겠다고.”
〔……〕
“모르겠어.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조르는 건지도 몰라. 이해를 못 하니까. 너는 뭐든지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렇잖아? 너는 늘 그걸 원해. 이해하는 거. 하지만 어떤 것들은 이해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러니까 약속해. 나를 위해서.”
더 이상 따지는 건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가 원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싫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지금 나에게 이제껏 내가 원하던 것을 주지 않았나? 그가 엉터리 같은 맹세를 원하고 있었다. 지킬 필요 같은 건 없어 보이는 맹세를. 마법의 콩을 가진 소년이 내게 맹세를 원한다. 그 순간 내가 그에게 해주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할게.” 내가 말했다. “오직 너를 위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자 멍든 입 위에 찢어진 입술이 포개지면서 우리의 맹세는 봉인되었다. 옛이야기 속 소년들처럼 손가락에 피를 내어서가 아니라.
--- pp.207~209 「2부」중에서

그때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느껴진 것은 떨어져 있을 때뿐이고, 그때의 시간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시간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도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들을 한 건 함께할 일이 필요해서였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무밖에 없었다.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p.223 「3부」중에서

아버지는 알았다. 알고 있다. 내가 배리와 어울리기 시작한 뒤 어느 시점부터 아버지는 사태를 파악했다. 배리가 남자들이 친구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 이상의 친구라는 걸. 왜 아버지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별로 생각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눈치채기에는 너무 둔하다고 여겨서?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잘난 척하는 원숭이가 될 것인가. 아버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동안 나는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 아버지와 이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앳킨스 씨, 아직은 아니다. 그러기 전에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정리하고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 pp.330-331 「4부」중에서

“그러니까 네 말은 배리가 그저 내 상상의 산물이었다는 거지?” 내가 웃음을 시도하면서 말했다.
카리가 미소 지었다. “그랬는지도 모르지.”
“헛소리야! 배리는 이 세상에 있었어. 내 곁에 있었어. 나하고 잠도 잤어. 물론 너하고도. 배리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 누군가 존재했지. 하지만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또 내가 생각하던 사람도 아니었는지 몰라.”
“네 말은 우리가 사람들을 상상으로 꾸며낸다는 거잖아. 말도 안 돼.”
“아니, 그럴 거야. 아마 우리는 우리 자신도 꾸며내고 있을 거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 p.339 「4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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