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는 얼굴에 부딪히는 알싸하게 매운 공기를 느끼며 힘껏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언덕은 역부족이었다. 내려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데 엄마 휴대폰 톡, 글자가 생각났다.
“보고 싶어요. 뭐 해요? 언제 봐.”
“그만 자. 안녕. 내일.”
딱 봐도 북극곰이란 인간이 엄마에게 들이대며 질척대고 엄마는 은근슬쩍 어장 관리에 들어간 것 같았다. 물어볼까? 아니야, 또 언제 끝낼지 몰라. 제발 쫑내라, 쫑내라. 송이는 걸음을 옮기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답답한 마음에 올려다본 짙푸른 하늘엔 말갛게 씻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녔다. 아직 꼭대기까지 한참 남았다.
--- pp.14-15
“나, 갈게.”
송이가 좋아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반이나 남았다. 아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왜, 아빠가 뭘 잘못했어?”
“됐어. 학원 가야 돼.”
“어, 그래. 그렇구나. 참, 송이야. 낼모레가 한우리 돌이야, 이제 걸음마도 시작했어.”
한우리는 아빠가 재혼해서 낳은 아이다. 지난번에 사진과 동영상으로 봤는데 엉금엉금 기는 모습이 귀여워서 송이도 가끔씩 생각하곤 했다.
“좋겠네, 예쁜 딸이 또 하나 있으니.”
오도독, 얼음을 씹듯 쨍하게 쏘아주고 벗어둔 목도리와 가방을 들고 나왔다. 급히 뒤따라 나온 아빠가 기어이 스노볼 쿠키를 가방에 밀어 넣었다.
“잘 가. 무슨 일 있음 연락하고.”
너무 애쓰지 마시라, 이런다고 이미 흩어버린 신뢰가 다시 싹틀 일은 없을 테니까. 송이는 떠나려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아빠가 손을 흔들며 어정쩡하게 따라왔다. 괜히 눈물이 핑 돌고 속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고개를 한껏 젖히고 눈물을 말렸다. 물기가 배어나오지 못하게 눈뿌리에 힘을 주었다. 길가에 붉은 잎을 떨구며 서 있는 나무에 시선을 멈췄다. 큰 키에 비해 나뭇가지가 빈약하고 앙상하다, 지금 송이의 마음처럼. 딸 앞에서 쩔쩔매며 눈치를 봐야 하는 아빠, 그 아빠가 야속하고 원망스런 송이. 언제쯤이면 이 앙상하고 빈약한 관계가 다시 풍성하게 피어날까? 쓸쓸한 송이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가 휘익 지나갔다.
--- pp.34-35
“광석은 정말 좋은 아빠야. 백퍼 인정.”
“그니까, 진작 좋은 아빠가 될걸. 아들, 아빠가 미안해. 아빠 맘 알지?”
광석 원장이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미안해’에서 끝내. ‘아빠 맘 알지’는 묻지 말고. 준서가 아빠 맘을 어떻게 알아? 말하지 않으면 몰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이제부턴 이렇게 말로 표현해야 돼.”
송이 말에 광석 원장이 콧날을 붉혔다. 병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엄마와 할머니도 서로 마음을 표현하면서 뭔가 풀어졌다. 부모 자식이라도 말 안 하면 몰라, 송이는 속으로 가만히 말했다.
“송이도 고마워. 어릴 때부터 준서하고 잘 놀아주고 도와줘서. 내가 송이 은혜를 못 잊는다, 진짜!”
“됐어. 그런 건 고마운 게 아니야. 친구니까 당연한 거지.”
송이의 시들한 대답에도 광석 원장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 pp.119
“기린, 외롭고 슬프니? 우리 엄마가 너처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가슴이 싸르르르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눈을 닮았다는 순하고 투명한 큰 눈망울 때문이 아니었다. 길게 뻗어 흔들거리는 모가지와 튼실한 엉덩이 밑으로 쭉 뻗어내린 두 다리, 그 긴 것들이 송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저 긴 목은 푸른 하늘을 이고 있어야 했고, 긴 다리는 넓은 초원을 달려야 했다. 절대로, 이 좁은 곳에 갇혀 있으면 안 되는 긴 것들이었다. 하늘을 이고 초원을 달리지 못하는 긴 것들의 슬픔이 큰 눈망울에 맺혀 있는 것이다. 투명한 공기와 물방울을 가득 담고.
송이는 두 팔을 벌리고 유리창에 붙어 서며 따지듯 말했다.
“그럼, 엄마는? 직립보행으로 다른 영장류에 비해 길긴 하지만 뭐가 그리 외롭고 슬프냐고……?”
기린이 송이를 가만히 보고 있다.
송이도 가만히 기린을 보고 있다.
기린의 두 눈에 눈물이 그득하다.
송이의 두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 pp.158-159
“(…) 차라리 혜경 씨와 깔끔하게 분리하면 좋겠어. 모녀 분리 독립.”
송이가 지겹다는 듯 머리를 흔들자 광석 원장이 흐흐흐, 괴기스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음……. 송이는 엄마를 죽여야 돼.”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와, 잔인하다. 엄마를 죽이다니.”
불뚝 일어서는 목울대를 가까스레 쓸어내렸다.
“잘 생각해 봐. ‘엄마’라는 말 속에 내포된 게 어떤 건지. 송이의 엄마 사용 매뉴얼은 딱 정해져 있잖아. 무조건 아가페적인 모성애로 송이를 위해 희생하는 여인. 내게 필요한 엄마, 한마디로 필요충분조건을 요구하고 있어. 그래서 엄마를 죽여야 한다는 거야. 송이 맘속에서 그런 엄마를 죽인 후 한 인간, 한 여자로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지. 엄마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서 송이 생각과 고집만 강요하지 말라는 거야. 그럼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게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 인간 대 인간으로.”
뭔가 알똥말똥 헷갈리면서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광석 원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송이, 다시 말하지만 엄마를 죽여야 해. 공간 분리 없이 모자 분리만을 원한다면 그게 가장 확실해. 송이도 홀로서기 하고, 혜경 씨도 자신의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도록 서로 도우며 연습해야 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아. 생각해 봐, 혜경 씨의 시간을 송이를 위해서만 쓰면 안 되잖아. 정말 사랑한다면 혜경 씨의 시간도 지켜줘야지. 안 그럼 혜경 씨가 너무 불쌍해.”
--- p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