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준 대로 은행 앱에다 계좌번호를 누르자 이름이 떴다. 우규민이었다. 우규민이라니. FA를 두 번이나 한 최고의 언더 핸드 투수도 인생에서 야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프로야구가 계속됐다면 좋은 코치가 됐을 텐데. 해설을 해도 잘했을 거다. 타 팀으로 이적했지만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는 선수였다. 반가운데 반가운 티를 낼 수 없다는 게 슬펐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야구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울고 웃던 기억 전부였다. 그래, 이젠 정말 야구를 하는 거야. 야구 내가 지킬 거야. 규민이 형, 지켜봐줘. 최고의 투수가 될게. 입금을 완료하고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우규민이 내 손을 마주잡았다. 80승-80홀 드-80세이브라는 KBO의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운 남자의 두터운 손바닥이 내 손을 덮었다. --- p.16 「인생은 그라운드」중에서
아, 포르투갈. 마르방 올리브 축제는 그 본질에 있어 증평인삼골축제와 다르지 않았다. 세계는 동일하다. 지구는 미국 아니면 유럽이다. 세계는 한때 유럽이었고 현행적으로 미국이다. 어디에 서 있든 당신은 다르지 않다.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엄청난 깨달음이 죽마 위에 선 나를 한순간 휘청거리게 했다. --- p.71 「포르투갈」중에서
살펴보니 MBTI라는 게 사주팔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덟 개의 글자를 모아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원리는 같았다. 육십갑자를 간소화해 열여섯 개의 유형으로 줄인 것은 서구적 합리성의 반영이라 할 만했다. 내가 오래 고민한 것은 오행에 대해서였다. B는 Bool이니 화火이며, T는 Ttang이니 토土였다. I가 조금 헷갈리긴 했다. 하지만 답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표’로 번역되는 Indicator에 다른 뜻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엔진 장치의 실린더 내부 압력을 표시하는 기계. 이것은 틀림없는 금金이었다. 문제는 M이었다. Mok이니 목木인 것인가, Mool이니 수水인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조금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M은 절대 水가 될 수 없었다. 영락없는 木이었다. --- p.92 「여기서 울지 마세요」중에서
정소려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척하고 검어진 내 뺨을 어루만졌다. 무슨 꿈을 꾸느냐고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였냐고도 물었다. 보이지 않고 기척만 느껴지는 꿈이라고 대답했다.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울면서 깬다고. 정소려의 눈이 붉어지더니
나도 그렇다고. 매일 아침 울면서 일어난다고. 죽어간 사람과 죽어갈 사람들이 자꾸만 보인다고. 어린아이들이 학생들이 교복 입은 사람이 일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이 다만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 모여 있는 사람이 서 있던 사람이 앉아 있던 사람이 죄 없이 도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 pp.163~164 「z활불러버s」중에서
“살아 있죠? 밥 먹죠? 옷 입죠? 어떨 땐 카드로 할부도 하고 공과금 나오면 안 내고 연체료 쌓이게 뒀다가 서너 달 치 한 번에 내죠? 밤에 늦게 자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죠? 병원에서 약 받아오면 이틀 치 먹고 다 버리죠? 전부 약정된 거예요. 이승진씨의 삶 전체가 약정이고 약정 할인이 엄청 들어가 있어요. 이걸 개명하면서 정리해버리면 약정 해지 위약금이 상당하게 청구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이미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또 문제가 있어요?” --- pp.194~195 「이승진, 이승진 그리고 이승진」중에서
“그러니까 그 옹스테드라는 분은 지금…… 매달려 계신가요?” “옴스테드는” 나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옴, 옴, 옴오오오오오ㅗㅗ옴스테드는” 옴, 할 때마다 머리통이 울렸다. “재배되고, 수확되고, 낙과하고, 갈리고, 썰리고, 절여지고, 으깨져서 이렇게 내 앞에 스크루드라이버로 섞여 있습니다. 그가 원하던 바대로죠.” “멋진 이야기네요.” 묘하게 냉소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그에게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오렌지에 관해서라면” 바텐더는 앞에 앉은 손님의 미묘한 심리 변화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다 된 것 아닌가요. 아무리 멋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죠.” 이쯤 되면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pp.210~211 「오렌지, 였던」중에서
국장실에 국장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럴 때는 누구한테 인사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허공에 고개를 숙이면 아마추어처럼 보이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건방져 보인다. 권유수는 구 년 차 공무원의 숙련된 감각으로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둥굴레차 주전자에 허리를 굽혔다. 상석에 앉은 백발노인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자네가 권주임인가?” “네. 낙엽관리부 권유수 주무관입니다.” “거기 앉게.” 권유수의 자리는 문간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무릎 위에 업무 수첩을 펴고 펜을 꺼내들었다.
아마도 김홍 소설을 읽고 다들 유머에 대해 말할 텐데, 솔직히 소설에서 유머는 징글맞게 까다로운 것이다. 소설이 독자를 웃기려 들면 독자는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엄격해진다. 인터넷에서 자주 본 ‘드립’도 안 되고, 작가 혼자만 키득거리는 폐쇄적인 익살도 안 된다. 오직 웃기는 것만이 목적인 텅 빈 말장난도 안 되고, 은근슬쩍 교훈을 박아놓은 갑갑한 골계도 안 된다. ‘유머러스한 소설’ 아래에는 빽빽한 바늘 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김홍은 이 까다롭고 복잡한 바늘 위를 더없이 자연스레 거닌다. 소설을 읽다보면 익숙한 농담에 갸우뚱하는 찰나, 살짝 꺾였다 무섭게 휘며 마음을 스산하고 뭉클하게 만드는 훅이 온다. 김홍은 소설에서 유머가 해내야 할 것을 해냈다.
- 이미상 (소설가)
김홍의 소설은 휘황찬란하다. 태양만큼 밝아지는 인간, 산산이 흩어지는 인간, 인간 속의 인간 따위 온갖 종류의 초현실적인 인간들이 너무나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나에게 무슨 사기를 치려는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늘어놓는 현란한 말들의 곡예에 홀린 듯 넘어가 내 전 재산을 내어놓고 싶어지게 만든다.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똘똘한 이자로 보답을 할 것 같아서? 대단한 기술이다. 아니, 진정한 마술이다. 근데 솔직히 요즘은 다들 나와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똘똘한 기적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원하고 있지 않는가? 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딱 그런 기분. 설명하긴 어렵지만 진짜 딱 그런 기분, 뭔지 아시죠?
- 김사과 (작가)
이는 소설 속에서 연속적인 변화보다는 불연속적인 변이가, 단계적인 사연보다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사건이, 개연성보다는 우연성이 더 강력한 현실성을 동반하는 방법론으로 등장하는 실질적 배경이다. 김홍의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일종의 ‘황당함’은 금융자본주의 아래 극단으로 치닫는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를 살아가는 삶의 감각을 반영한 전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