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생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목숨이 두 개라면 하나쯤 희생시키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목숨은 단 한 개뿐이라서 소중하기 짝이 없다. 모든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시작은 어렵다. 시작이라는 현실감각을 쟁취하기가 쉽지 않다. ‘학문이 사막’이라는 이 공식부터 손에 거머쥐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하지만 수학에서도 공식이 이해되면 아무리 숫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철학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차분하게 공식부터 이해하려는 요량으로 시간을 충분히 보내보자.
--- 「학문의 사막에서 하는 정신의 여행」 중에서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아니, 나의 구원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모든 개인은 혼자가 된 자신을 구원해 무한한 자연 속에 풀어놓아야 한다. 내 안의 미궁 속에 빠진 정신은 자신의 인생을 허무하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런 정신은 고통을 당해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원인을 모르고 당하는 고통이 인생을 허무하게 만든다. 자기가 아닌 자기 속에 빠져 길을 잃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자기가 아닌 자기는 괴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괴물은 반드시 찾아가서 죽여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살리는 자가 초인이다.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든 후 예의를 갖춰 제사를 지내주면 된다. 자기를 희생시키지만, 그런 희생을 통해 자신은 되살아날 뿐이다.
--- 「길이 있어도 길이 아닌 미궁에서 길을 찾기」 중에서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삶의 문제는 사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다양한 계절을 견디면서 나이테를 만들며 살아가듯이, 그렇게 사람도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내면에 상처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 니체는 사람의 변화를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어린아이의 단계’, 이렇게 3단계로 설명했다. 사람은 제일 먼저 낙타가 되어야 한다. 외운 것도 없으면서 잊겠다고 하고, 짊어진 짐도 없으면서 짐을 벗어던지겠다고 하며, 정이 든 적도 없으면서 정 떼기를 하겠다는 식의 발언들은 모두 자기모순에 빠진 정신들에 기인한다. 하나의 생각에 갇힐 때, 정신은 정신이기를 포기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에 긍지를 갖는 정신은 이때 탄생한다.
--- 「정신이 짊어져야 할 짐」 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람이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은 죽음 앞에서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과 함께 정신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것이 틀림없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좋은 말로, 좋은 생각을 이끄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좋은 생각은 평생 해도 모자란다. 평생이란 시간도 품을 수 있는 것이 좋은 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는 것이 문제이지, 죽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 했다. 피안은 이념의 문제일 뿐, 현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피안은 그저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무에 삶의 중심을 두면 이성과 본능 전체가 말썽을 피우고 만다. 생각하는 존재가 무에 불과한 말에 휘둘리면 답이 없다.
---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유」 중에서
신이 신의 자격을 상실했다. 그런 신이 존재한다. 그런 신의 존재 앞에서, 삶은 또 다른 신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이때 사자의 정신이 앞장을 선다. 그 사자의 정신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니체는 ‘나는 하고자 한다’를 알려주었다. 두 개의 이름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이름이 앞장설 때도 있고, ‘나는 하고자 한다’라는 이름이 앞장을 서야 할 때도 있다. 낙타의 정신이 짐을 짊어지는 정신이었다면, 이제 사자의 정신이 나서서 그 짐을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짊어져야 할 짐을 필요로 할 때는 짐을 찾아 떠나는 것이 숙제였지만, 그 짐이 더 이상 짐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과감하게 벗어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 「자기 의지로 굳게 선 사자의 정신」 중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무의 인식이다. 무에 대한 깨달음은 무궁무진하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을 제공해준다. ‘마지막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신을 죽이고 나면 세상이 끝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순간은 새로운 세상이 탄생하는 순간이 될 뿐이다. 세계의 현상은 그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는 내가 문제이다. 현상은 돌이나 물처럼 존재하는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현상은 사물이 이성에 비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현상도 현상 나름이라는 말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어둠이라는 현상을 앞에 두고서도 누구는 귀신을 보는가 하면, 누구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생각해내는 이도 있다.
--- 「숲과 원시림 속에서 혼자가 된 나」 중에서
돌고 도는 현상으로 신의 죽음과 초인의 출현은 맞물린다. 이는 신이 죽어야 초인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즉 신은 초인이 탄생할 수 있는 원인이고, 초인은 신의 죽음과 함께 그다음의 순간을 이어가는 존재의 형식이다. 늘 그다음이 초인의 문제이다. 이처럼 신과 초인은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서로를 위해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신을 죽인 것은 스스로 신이 되었지만, 결국에는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신을 죽이고 나니 이제부터 새로운 기다림이 시작된다. 이때 등장하는 기다림의 주체는 신과 초인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교량이 된다. 즉 여기에서 저기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 「신을 죽인 후 등장하는 초인」 중에서
자기 삶에서 무엇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로 인식되고 있는가? 누구는 돈 몇만 원을 사기당해서 정신 줄을 놓을 뻔했고, 누구는 ‘입만 열면 받을 돈 운운’하다가 인생 전체를 망쳐버리기도 한다.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그 대표적인 예가 이런 것들이다. 생각이 처한 상황은 생각이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잃었어도 가진 것에 몰두할 수 있다면, 길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그 잃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답이 주어질 것이다. 없어도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다.
--- 「가장 어려웠던 순간과 가장 고마웠던 순간」 중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해주는 것은 희망의 존재 여부에 달렸다. 세상에는 희망이 있는 사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희망적이다. 그는 자신의 희망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해주는 동력의 원인이 된다. 죽을 듯이 달려들지만, 그런 달려듦이 자신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는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은 신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 자신도 기적을 낳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기적은 논리적이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은 오로지 비이성의 영역에서 실현된다. 이성적인 존재가 비이성을 감당할 수 있을 때만 희망의 원리가 작동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희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둔 정신은 어떤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갖고 안 갖고는 인간의 소관이다. 희망 그 자체에 대해 신은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 「희망은 인간의 것, 나의 것」 중에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삶을 선물로 받은 존재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늘 선악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다가, 그 짐을 벗어던지고 사자의 정신으로 저편의 삶을 실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낙타의 정신으로 사막을 건너는 것도 삶이고, 사자의 정신으로 자유를 즐기는 것도 삶이다. 사랑은 사람에게 영원을 가르쳐준다. 영원을 알고 있기에 사람은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 「미쳐야 사랑도 할 수 있다」 중에서
별들은 밤하늘을 밝힌다. 별빛이 어둠을 밝힌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을 보게 해주는 것이 별이라는 존재이다. 별들은 늘 높은 곳에서 빛의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별이 있는 곳은 하늘이고, 하늘은 대지의 반대편에 있으며, 대지의 반대편은 하늘의 의미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한마디로 별들은 하늘 높은 곳에 있다는 얘기이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할까? 죽을 때까지 올라가야 한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할까? 삶이 허락하는 데까지 올라가야 한다. 무엇을 목적으로 둬야 할까? 이성이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목적을 둬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 「별들이 발아래 놓일 때까지 올라가라」 중에서
사람은 망상과 싸워야 한다. 생각하는 존재는 끊임없이 망상을 좇기도 하고, 그 망상에 쫓기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소중한 인식을 얻어야 한다. 좇는 것이 망상일 때는 결 국 그 망상에 쫓기는 자가 되는 신세를 깨달아야 한다. 생각하는 존재가 생각을 잘못하면 스스로 그 생각에 쫓기는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하나의 생각을 짐으로 짊어지고 견뎌야 하는 시간은 낙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고, 그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지경에서는 사자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잊으면서, 또 질투조차 동정하면서 하염없이 높이 날아주면 된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하면 그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를 바라보면 될 일이다. 이때 요구되는 것이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 「망상을 망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중에서
‘삶 자체에 대한 긍정’,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것이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을 어린아이는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벗어나며 세상에 태어났다. 탄생은 이런 식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모든 탄생은 이별을 전제한다는 얘기이다. 모든 이별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런 고통 없이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것도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비극을 떠안으며 대지로 돌아가는 삶에의 의지」 중에서
영원은 두 가지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하나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이다. 하루를 살아도 그 하루는 영원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 하루를 영원으로 인식하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주어져 있지만, 누구는 그 시간을 두고서도 시간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누구는 시간이 남아돌아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 「순간에 대한 고민과 인식」 중에서
죽을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초인의 인생 여정이다. 그런 여정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어른의 형상이 구현되는 것이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열심히 살라! 나무는 겨울 동안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이테를 만들지만, 그 나이테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삶은 변화 속에 있고, 그 변화 속에서 성숙해지며, 그런 시간 속에서 소중한 인연이 맺어진다. “오직 변하는 자만이, 나와 인연이 있다.”(선악)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고, 변화 속에서 운명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 「행복을 맛본 후에는 스스로 찔러서 터뜨려야 할 심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