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담는 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크기에 따라서 말의 수준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다. 일명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누군가를 현혹시키고 이용하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갈등을 극복하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말을 사용한다. 너와 나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 p.17, 「말이 주는 상처가 가장 아프다」중에서
사람은 자신의 품만큼 말을 채운다.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공간이 충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받아들인다. 조급하거나 야박하게 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 ‘너는 모르겠지만’, ‘내 말 좀 들어봐.’ 하며 상대의 말을 자르고 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구나.’, ‘더 말해봐.’, ‘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입을 더 열게 만든다. 그것이 상대방의 불안함을 낮추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그릇이 큰 사람과 대화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 p.39, 「말 그릇이 큰 사람」중에서
신기한 것은 말에 관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숨겨두었던 가정사, 털어 놓을 수 없었던 직장에서의 문제, 친구 혹은 연인 관계에서의 갈등과 고비 등등 자신을 괴롭혀왔던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딸려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두고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한 사람의 말을 움직이고 있던 심리적인 근원과 마주치게 된다.
--- p.52, 「마음이 변하면 말이 변한다」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느라 감정을 배우지 못하면 자라서도 감정에 서툴다.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넘치게 사용한다. 자기 마음 한 평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색을 모른 척하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감정만 보여주면서 살게 된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에 익숙해진다. 좋을 때는 표현도 안 하다가 억울한 일에만 반응하며 눈을 부라리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이른바 ‘분노중독’이다. 화를 내면서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며 점점 거친 말, 센 말만 찾게 되는 것이다.
--- p.75, 「감정에 서툰 사람들」중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나의 말’과 ‘상대방의 말’이 너무 달라 갈등을 일으킬 때가 있다. 처음에는 좋게 이야기해보려고 하지만, 어느새 언성은 높아지고 감정은 격해진다. 이런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머릿속 공식에 대한 이해’다. 한 사람의 특별한 공식과 감정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각의 공식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걔 때문에 미치겠다”고 하소연한다. 급기야 “나는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말로 상대를 몰아세운다. 그 기저에는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네 생각을 뜯어 고치고 싶다는 바람이 들어있다.
--- p.107, 「머릿속에 만들어진 공식」중에서
타인의 말을 담는 그릇이 넉넉하려면 한 가지 공식에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소신 있게 의견을 제시하되 그것이 관점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내게는 값진 보석이지만 타인에게는 발에 차이는 돌덩이가 될 수 있다는 것,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만 크고 작은 차이들을 조정하고 갈등을 통합해나갈 수 있다. 차이는 분명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공식의 차이가 결국 ‘인간성과 우열’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과 공식’의 차이라는 것을 알면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 p.123, 「나도 너도 꽤 괜찮은 사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