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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6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256g | 125*200*20mm
ISBN13 9788927805533
ISBN10 892780553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정익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계간 《시와 사상》에 「콘트라베이스 인상」 외 9편으로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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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던 말과 하지 않을 말, 그것이 비트겐과 슈타인이다.
밤마다 우리 집 근처에서 이유도 없이 서성이며 휘파람을 불던 그가 바로 비트겐,
곧고 강직한 결코 누워서 자지 않았던 사나이, 슈타인
비트, 비트박스, 비트겐슈타인!

향후 일 년간 우리 학과 지도 교수 슈타인과
환경미화원 비트겐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상기후에 관한 나의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고야 만다.

밤새워 연구 논문을 쓰고 수영장 후문을 빠져나오는 슈타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경마장 셔틀버스를 잽싸게 올라탄다.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한편 청소를 마치고 영안실 입구로 들어서는 비트겐,
보라색 양복을 걸친 그의 왼쪽 주머니에
하늘색 장미가 꽂혀 있었다.

비트겐, 미안하다. 그저 휘파람이나 불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너에게
영안실을 상속해줄 수 없구나. 다만 네가 홀로 증발하지 않도록, 약속하마.
슈타인, 어떠냐? 아직도 어린 말들과 함께 서서 잠드는지 궁금하구나.
그렇다면 너희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말과 하지 못할 말들의 의미는?

수박이다. 비트겐과 슈타인으로 쪼개지는, 수박!
넌 언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되었니.
-「비트겐슈타인」


오전 한때 내 머리카락에 불이 났습니다.
차가운 머리로는 뜨거운 생각들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행운이 있었죠.
그건 순전히 금붕어 때문이었지요.
오전에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했습니다.
그곳 수족관에 가보세요.
세계적 차원에서 보내 온 축전들이 쌓여 있을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는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로 개업했다 폐업하고 다시 개업했습니다.
뭐, 제가 좀 열심히 사는 편이죠.
시인 T는 사막의 중심에서 바다까지 연결된
테이블 위, 상징물로 배치해둔
야채와 육고기에 자신의 시론을 비유했지요.
그가 내 등에 업혀 손가락을 뜯어 먹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었죠.
시 이론을 영역 중이었어요.
알다시피 난 반역하는 사람이 아니죠.
반역은 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죠.
플루토 항공우주국에서 전화가 왔죠.
우주정거장 개막식 참석 여부를 묻더군요.
예, 초청장은 받지 않고 문자는 받았어요.
네, 네, 가겠습니다.
나의 전용 로켓 ‘달무리호’를 발사,
기념식에 참석하여 주변 행성을 좀 둘러보다
집으로 얼른 돌아왔습니다.
아코디언처럼 압축된 오전의 비명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정오입니다.
―「오전의 탄력으로 펼쳐진 오후」


내가 추억을 떠올리는 가장 익숙한 방식은
빵집의, 벽시계의, 초등학교의, 강아지의 이름이
아니라 배우들의 이름이다
즈느비에브 뷔졸드
그녀였다
서점에서 최신 영화 잡지…… M을 뒤적이다
40년가량 잊고 있었던 그녀를 0.01초 만에 알아보았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녀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직 살아 있어 고맙다, 라고 말할 뻔했다
〈천일의 앤〉에서 앤 불린을 연기했던 그녀……
머리와…… 얼굴이 유난히 작고 예뻐서 영원히 늙지 않을 거 같았는데
할머니 같은 소녀가 되었다, 즈느비에브 뷔졸드(42년생)
샤를로트 갱스부르(71년생) 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美는 기억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사르트르도 한때 프랑스였겠지만
줄리 크리스티(라라, 41년생)도 엄청 늙었고
장 루이 트래티냥도 엄청 할아버지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32년생), 데버러 커…… 이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리 마빈, 막시밀리안 셸도 죽었고
말론 브란도(24년생)도 죽었다
그네들과 비슷한 연배인 27년생이신 나의 아버지
정종옥 씨께서는 잉그리드 버그먼을 좋아했고
33년생이신 나의 어머니 배소란 여사는
대머리에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의 배우,
율 브리너를 무척 좋아하셨다
이빨은 빠지고 허리도 아프시지만
두 분 다 밥 잘 드시고, 잘 계신다
-「청춘」


팅, 탱, 경쾌하게 오가는 셔틀콕 소리에
겨드랑이 속 접어두었던 날개가 움찔한다.

끼리끼리 한 조를 이루어 팝콘처럼 튀어 오른다.
팅, 탱…… 어, 어라, 이 친구,
그것도 하나 못 받아쳐? 물 좋은 시절 다 지나갔군.

그러니까 본론은 피부를 탱탱하게 하고
생활에 탄력을 준단 말이지.
팅탱, 팅탱, 사랑 주고, 눈물도 주고…… 이봐, 그렇다고
너무 쉽게 튕겨나서는 안 돼.

누군가와 이별을 할 때까지 훌라후프를 돌려보는 거야.
자, 돌려봐. 더 세게, 그렇지 계속해서, 힘내, 더, 더,
봐, 헬리콥터처럼 떠오르잖아.
너도 가끔씩은 뜨고 싶을 때가 있잖아.

결론은 평행봉이야. 겨드랑이 속으로 오그라드는
두 날개를 펼쳐봐. 우선 멱살을 잡고 보는 거야.
힘들겠지만 해보는 거야. 힘들지 않으면 그게
사는 거야? 하나둘, 하나둘, 두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려.
중심을 잡고 세상과 수평을 유지하는 거야.

마음 뿌듯해지는군.
우, 이 근육 좀 봐. 탱탱하지.
-「서론, 본론 그리고 평행봉」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한 토막은 변기의 극장 속으로…… 한 토막은 지붕 위의 날개 위에서
또 다른 한 토막은 내 새끼손가락에서
꼼지락거린다, 꼼질꼼질
실내악 연주가 끝나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흩어져버린 발자국들과 함께
앞뒤가 토막나버린 구절들;

……파아노를 메고……
……향수도 없이……
……접시 위에 떨어진 그 여자의……
……꼬리를……쓰러져……
……더욱 독해진……
……불타는 안경이……
……폭설이었다……
……우산이 먹어버린……
……곤충에 매달려……
……물속으로……에서……

나머지 구절은 다 죽거나 우물에 빠지거나,
발가락에서 다시 꿈틀거린다

변기 속에서 두 개의 머리가 떠오른다
침대 위에서 몸통이 지그재그 기어 다니고
내 혓바닥에서 깃발을 흔들어대는 꼬리

한 토막은 절망에 두고
한 토막은 남부민동에서…… 또 다른
한 토막은 습관처럼…… 돌고, 돌아

아미타는 관세음을 낳고 관세음은 석가를 낳고
석가는…… 지장을 낳고…… 낳고
―「도마뱀」


얼굴 하나가 꿈속에 잠겨 있는
그 시각, 다른 얼굴 몇몇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깨어난다.
그들 얼굴이 여름의
빨랫줄에서 말라가는 동안
다른 얼굴은 바다 깊은 곳에서
생각에 잠긴다.
우리들 얼굴 속의 또 다른 얼굴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햇볕 때문에 더욱 침울했던 얼굴들,
얼굴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얼굴에서 총알이 발사된다.
얼굴에서 수류탄이 날아온다.
얼굴 속에 가득한 무관심이
다른 얼굴들에 칼자국을 낸다.
길바닥에 떨어진 탄피와
유리 파편, 그리고 살과 뼈들
바람이 불고 마른 얼굴 껍데기가 굴러간다.
바닷물이 빠지고 퉁퉁 불은
얼굴들이 눈을 뜬다.
-「얼굴의 반격」


손바닥
혓바닥
발바닥
허벅지가 각각 아홉 개

아홉 개는 아홉 개의 시간을 가지고
여섯 개는 여섯 개의 심장

여기에는 ‘여기에’가 아홉 개 있지요
네 개는 아홉 개지요, 여기가 거긴지 알 수 있겠어요?
다섯 개는 아홉 개지요,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어요

나와 당신의 뼈를 합하면 몇 개 일까요?

위로 가도, 앞으로, 뒤로 가도 아홉 개지요
세 발자국, 네 발자국 절벽에서 떨어지면 너는 날아오르죠
여섯 발자국에서, 영혼은 빠져나가죠
한 발자국 남았어요

돌 하나 세워두고 부서질 때까지 쳐다보세요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손바닥으로 비틀고
혓바닥에 녹음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며
허벅지가 터지도록
발바닥이 닳도록
―「큐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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