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버라고? 박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뜬금없이 찾아와 통장을 트라니. 별 이상한 노인네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노인네, 몇 년 사이 정신이 살짝 이상해진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자신의 수술법이 세상의 지탄을 받았다면, 지금까지 그 트라우마에 갇혀 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을 대신할 손을 찾아 수술을 완성하겠다는 과대망상. 그 망상이 노태수로 하여금 세이버 수술 재건이라는 엉뚱한 일을 꾸미고 다니게 하는 건 아닐까. (29쪽)
수현은 뭔가에 홀린 듯싶었다. 그저 사내가 시키는 대로 물을 끓였다. 비명을 지르는 소년의 입에 약초를 적신 헝겊을 물리자 소년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사내는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찢어진 상처 부위를 다루기 시작했다. 근육과 신경을 잇고 상처를 봉합하는 손놀림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찢어진 부위 안에 손을 넣어 끊어진 근육을 봉합하고 갈라진 살 거죽을 꿰매 봉합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사내의 손놀림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수현은 또다시 기시감에 휩싸였다. 분명 그 사내다. 수술실에 난입한 물장수, 아니 용천역 폭발 사고 현장에서 봤던 북한의 그 천재 의사. 이런 우연이라니. (68쪽)
“연앤 안 하셨습니까?”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나? 그땐 완전히 심장에만 미쳐 살 때였거든. 자다가도 심장 생각을 하며 벌떡벌떡 일어났지. 근데 고게 참 알면 알수록 이상하더라고.”
“심장이요?”
“응, 주먹만 한 고게 말이지. 사실 아무것도 아닌 세포 덩어리잖나. 근데 오로지 심장만이 스스로 뛴단 말이지.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면 뭐해. 아직도 영구 내연기관조차 만들지 못했는데……. 난 그 사실이 너무 경이롭고 신기했어.” (143쪽)
박훈은 손을 갈퀴처럼 심장으로 가져갔다. 손바닥 위에 심장을 완전히 올려놓은 형태가 되자 그는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심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방금 병변을 잘라내고 봉합한 환자의 심장을 손으로 마사지하다니, 제정신인가. 자칫 꿰맨 자리가 터질 수 있었다. 사방으로 분수같은 핏줄기를 뿜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러나 박훈은 단순히 심장만 마사지하는 게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심장을 마사지하며 동시에 왼손으로 흉부 대동맥을 차단한 채 혈액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었다. 마치 수압을 조절해 가며 화단에 물을 뿌리는 노련한 정원사 같다. 이렇게 하면 이완기 압이 높고 중심정맥의 압이 낮아 심장이 다시 뛸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단, 좌심실 처지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만! 맥이 뜁니다.” (205쪽)
‘아름답다.’
혈류가 돌아오자 잿빛으로 죽어가던 심장이 붉게 꿈틀거렸다. 민세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원수의 심장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이것이 생명의 힘일까. 민세는 혼란스러웠다.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면서도 마음은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심장이 뛰기만 하면 모든 게 완벽해지겠지. (249쪽)
---본문
박훈의 생각도 같았다. 우선은 수술 중에 환자가 죽지 않았으니 그것만이라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오리라 장담하긴 일렀다. 환자가 고령인데다가 맥도 형편없이 약했다. 오늘 수술의 결과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린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깨어나야 해. 당신의 딸이 아닌 나를 위해서.”
수술실을 나서며 박훈은 아무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동우로서도 이번 수술은 병원의 운명을 건 도박이 될 것이었다. 개성의료센터 주축병원 선정을 막후에서 결정할 수 있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가 자신의 노모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온 상황이었으니까. 자칫 실수라도 있는 날엔 개성의료센터 주축병원 선정 과정에서 불리란 입장으로 밀려날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수술이 성공하면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주축병원 선정 의원들에게 일일이 로비를 하는 것보다 장 장관이 결정적일 때 힘을 써준다면 일은 한층 수월하게 풀릴 것이었다.
딱 한번 채희가 주운 돌을 들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투박하게 생긴 흑요석이었다. 그날 채희는 그것을 박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선물이라며 수즙은 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박훈의 심장에 뜨겁게 피가 흐르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박훈은 손칼을 이용해 나무로 해바라기를 만들고 열여덟 장의 꽃잎을 조각했다. 흑요석을 둥글고 매끄럽게 갈아 해바라기 조각 중앙에 박아 넣은 뒤 삼 가닥을 여러 겹 꼬아 목줄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잠든 채희의 목에 걸어 주었다. 잠든 채희와 해바라기 목걸이는 마치 한 짝처럼 잘 어울렸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상념에 깊이 빠져든 박훈은 문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로소 인기척을 느낀 것은 그의 관자놀이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느낌을 감지하고 나서였다.
“흥, 여태 나를 잘도 속여왔군요.”
송채희였다. 그녀는 박훈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어 대었다. 박훈이 서서히 돌아섰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 그게 바로 박훈 당신이야. 그런 너를 내가 사랑하고 너를 위해 죽을 결심까지 했었다니.”
껌을 딱딱거리던 필리핀 간호사와 복수를 다짐하던 처연한 눈빛들, 냉장고를 열어 거리낌 없이 심장 하나를 꺼내 손에 쥐어주던 손길, 첫 수술을 성공시키고 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까지, 반드시 세이버수술을 세상에 재건시키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던 그 노인이다. 세이버수술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긴 세월을 기다렸고, 다시 최고의 수술팀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노태수,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이 이제 와서는 자구(自求)의 길을 닦은 셈이었나.
“결국 모든 게 결국 당신 목숨을 위한 도박이었군.”
피가 베어나는 가슴을 쳐다보며 박훈이 중얼거렸다.
수현의 눈길을 끈 것은 국경없는 의사회의 깃발도, 사내와 포즈를 취한 아이들도 아니다. 그 뒤편, 넓게 펼쳐진 의료텐트 앞에서 부지런히 수술을 돕고 있는 한 예쁘장한 동양인 여인, 왠지 그녀의 옆모습이 낯이 익었다.
“이상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민수현은 우편물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려본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이 엽서를 달구고 있었다.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