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에서 강성한 나라와 민족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의 칼날과 말발굽 아래 스러져 간, 그리고 사라져 간 민족과 나라의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반면 용기를 떨치든 지혜를 발휘하든 압도적인 강자에 맞서 생존을 쟁취한 이들의 존재는 의외로 희귀하다. 핀란드의 경우가 그랬다. 굽힐 때는 굽히되 단단할 때는 충분히 단단하며, 나아갈 때는 골리앗을 향해서도 거침이 없되 항상 퇴로를 고민하고 장렬한 죽음보다 살아날 궁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1940년대 골리앗 소련에 맞섰던 다윗 핀란드의 생존 비결이었다.
--- p.23~24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는 강자를 상대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약자의 교과서였다.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줄 아는 과감한 용기를 과시했지만 “저는 똥 덩어리일 뿐입니다”라고 바싹 엎드리며 강자의 비위를 맞추길 저어하지도 않았다. 강자 수나라가 자신이 지닌 강점을 총동원해 쳐들어왔을 때, 고구려는 상대의 약점을 들여다보았고 그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고자 수뇌부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솔선수범했다. 급기야 자신에게 몸을 의탁해 온 적의 반란자, 고구려에겐 은인일 수도 있는 곡사정을 송환하는 비열함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가 갖춰야 할 거의 모든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43
칼을 맞대고 싸우던 적이라도 돈만 더 주면 반대편으로 둔갑하기 십상이었고, 급료가 지급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하고 전장 이탈을 다반사로 하던 용병의 시대였다. 그러나 스위스 용병들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용맹함도 용맹함이려니와 그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았다. 스위스 용병에게 신의란 곧 스위스라는 모국의 국가적 신용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스위스 최대의 수출품인 ‘용병’의 품질에 하자가 있어선 안 되었고, 용병 수입은 곧 스위스 본국의 생존 그리고 독립과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 p.107
거인을 쓰러뜨려야만 용사가 아니다. 거인 앞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인간으로 해야 할 바를 지키는 용기를 낸다면 누구든 용사가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다윗들의 하나로 등재되는 것이다. 역사는 ‘위대한 업적’과 ‘결정적 사건’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누군가의 위대함은 결코 한 사람의 걸출함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역사를 바꾸는 영웅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은 그보다 훨씬 많은 누군가의 하찮은 손과 발에 의해 끌어 올려진 것이며, 더욱 많은 사람이 공들여 닦아놓은 길 위에서 돋보이게 마련이다.
--- p.139
역사 앞에 용감했던 이들을 돌아보면 중요한 건 얼마나 아느냐보다는 무엇을 느꼈느냐의 문제다. 엘저가 느낀 건 참혹한 전쟁을 다시 되풀이할 수 없으며, 그 전쟁을 불러올 사람을 나라도 죽여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이었다. 엘저는 교육을 받을 기회는 적었지만 나치의 폭력성에 분노했고, 고향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오른팔 들어 내미는 나치식 경례를 할 때 혼자 팔짱을 꼈다. 그리고 다가오는 전쟁의 냄새를 누구보다 역겨워했다. 그 결과 이후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전쟁의 책임자들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 p.176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도 달라진다”라는 말처럼 상황의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때의 용기와 각오를 서슴없이 버리게 한다. 하다못해 골리앗 앞에서 그리도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다윗이 늙어가면서 벌인 미련하고 어이없는 짓들은 성경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누구나 한때 용감할 수 있고 운 좋으면 한순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낼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일생 동안 스러지지 않는 발광체로 남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루이즈 미셸은 그런 사람이었다.
--- p.206
오늘날 은동고 왕국의 왕을 의미했던 ‘응골라’는 한 나라의 국명 앙골라로 남아있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은징가를 국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수백 년 전 왕의 칭호를 근대적 국가 이름으로 정할 만큼, 후손들은 그녀를 열렬히 기억하는 것이다. 압도적인 적뿐만 아니라 동족 남자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상대의 문화와 종교를 넉넉히 수용하되 그 탐욕스러운 발톱에 단호히 맞섰던 여왕의 역사는 수백 년 암흑기를 거쳐 그녀의 옛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다.
--- p.229
기나긴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또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골리앗들은 비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들만은 아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만도 아니고,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제도와 이데올로기만도 아니다. 상대하기 어려운 거인은 한없이 ‘정의로운’ 여론일 수도 있고, 실로 ‘지당한’ 분노일 수도 있으며,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슬픔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그 정의와 슬픔과 분노의 불길은 너무 뜨거워 쉽사리 접근할 수도 없고 저항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애시당초 이 불을 냈거나, 책임이 여실한 사람들이 불길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엄한 불쏘시개를 대신 던져 위기를 넘기는 꼼수도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 p.259
오라녜공 빌럼은 곧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었고, 지배자가 아닌 대표자였으며, 군주가 아닌 동지였다. 빌럼과 네덜란드인들은 세계사의 거대한 진전을 이뤄낼 시민혁명의 서막을 함께 열어젖힌 것이다. 미국 독립보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오늘날 네덜란드 국가의 가사는 말 그대로 빌럼의 고백이자 네덜란드인들의 다짐이다. “나사우 가문의 빌럼, 나는 네덜란드인의 혈통이다. 조국에 충성을 다함을 죽을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오라녜공으로서 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 p.274
어떤 종교든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율법에 따를 걸 강요한다면 종교의 신성함은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1977년 미샬 공주가 총을 맞고 쓰러진 순간, 1979년 이란 혁명수비대가 히잡을 거부하는 여성들을 타격한 순간, 2022년 이란 곳곳에서 히잡이 불타오르는 순간 그랬듯 말이다. 그때마다 신성의 장벽에는 미샬 공주처럼 용감한 이들의 돌멩이가 날아들게 마련이다.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