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브리어디가 지적한 것처럼 칼라일은 굳이 로비스트를 따로 고용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도 없다. 극단적으로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가 현직 대통령인 아들 부시에게 조언하거나 의견을 구하는 것이 로비일까?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드러난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퇴직 관료들이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통제 영역 밖이다.
칼라일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그 어느 사모펀드나 기업도 갖지 못했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장을 비롯해 법률회사들과 회계법인들이 칼라일의 흉내를 내고 있다. 멀쩡한 은행이 부실은행으로 둔갑하고 헐값에 팔려나가기도 하지만 역시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외국 자본 앞잡이 역할을 한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이들을 통하면 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수시로 CIA 브리핑을 받는다. CIA 내부에서는 이것을 ‘대통령 아빠의 일일 브리핑’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10년이나 됐지만 아버지 부시는 여전히 대단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쥐고 있다. 방위산업체나 외국정부를 상대로 대규모 비즈니스를 벌이는 글로벌 기업이 CIA 브리핑까지 받는다고 상상해 보라. 외국정부나 국제정치에 심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민간 기업을 상상해 보라. 이런 회사라면 어떠한 경쟁사도 떨쳐버릴 수 있는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회사는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회사는 아마도 칼라일을 닮아 있을 것이다.

대중과 언론은 정치가들이 현직에 있을 때만이라도 정직하고 공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일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대중의 감시와 균형’이라는 메커니즘은 정치인이 공직을 떠나는 순간부터 작동을 멈춘다. 정치인의 권력과 영향력은 공직을 떠나는 순간 축소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칼라일 그룹의 ‘전직 정치가들’이 해왔던 일들은 그 성격이나 규모 면에서 유래가 없는 듯하다. ‘칼라일 스토리’가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로 들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칼라일 그룹’은 스티븐 노리스와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이 주축이 되어 1986년에 설립한 미국의 사모투자기업이다. 칼라일은 처음부터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이나 시카고가 아니라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에 본사를 두었다. 그들이 장차 벌이고자 하는 비즈니스에는 워싱턴이야말로 최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칼라일의 비즈니스 방식을 한 마디로 일컬어 ‘안면자본주의(顔面-, Access Capitalism)’라고 부른다. 정실주의(情實主義), 연고주의, 인맥주의 등과 동궤에 있는 말이다.<br/>칼라일의 직원 명단은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다. 1992년 9월 16일, 영국은 국제적인 환투기 세력으로부터 파운드화를 방어하기 위해 280억 달러의 보유외환을 투입하여 파운드화를 매입함과 동시에 하루 두 차례나 이자율을 인상했다. 하지만 결국 영국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당시 존 메이저 영국 수상은 궁지에 몰렸다. 이 ‘검은 수요일’ 사건 당시 파운드화를 공격한 인물이 바로 ‘헤지펀드의 제왕’ 조지 소로스였다. 훗날, 존 메이저 영국 수상은 정계 은퇴와 거의 동시에 칼라일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소로스가 무려 1억 달러를 묻어놓은 회사였다.<br/>한편, 칼라일 그룹은 한때 ‘공화당 관료 출신자들의 망명지(a Republican administration in exile)’라고 비난받았을 정도로 레이건―부시 행정부 출신의 저명한 공화당원들을 영입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조지 W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아서 레빗 전 미국증권거래위원회 의장, 윌리엄 케나드 전 연방통신위원회 의장 등 저명한 민주당원들을 영입하기 시작한다. 흑묘백묘(黑猫白猫),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발 넓고 입김만 세면 그만 아니냐는 것이다. <br/><br/>칼라일은 일찍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해외(사우디)에 ‘용병’을 파견함으로써 ‘전쟁 비즈니스’라는 신종 산업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수백 개의 방위산업체를 포트폴리오로 거느리고 있는 칼라일 그룹은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이른바 ‘9.11 테러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칼라일의 아이러니 중에서 가장 심각한 사례가 드러나게 된다. 칼라일을 매개로 미국의 부시 가문과 사우디의 빈 라덴 가문이 오랜 동업자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br/>그동안 신시아 매키니 전 하원의원과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가공할 커넥션을 지적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진술은 대부분 심증으로 시작해 의문문으로 끝나고 만다. 처음에는 모두가 열광하지만 결국은 냉소하고 마는 소위 ‘음모론’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에 이 책의 저자인 댄 브리어디는 치열한 취재와 적절한 인용, 냉정한 분석을 통해 그 모든 심증들을 ‘물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 책의 서두에 추천사를 쓴 크리스토퍼 바이런을 포함하여 『The Spectator』, 『Economist』 등 현지의 유력 매체들이 한결같이 이 책을 두고 “완벽한 음모이론” 또는 “탐사저널리즘의 전범(典範)”이라 극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br/>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이언 트라이앵글(Iron Triangle)’은 ‘정치(정권)―전쟁(군)―돈(방위산업)’이라는 위험한 삼각 고리를 의미한다. 일찍이 1961년에 아이젠하워가 경고했던 ‘군산복합체’, 즉 미국을 움직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위험한 ‘그림자 권력’을 뜻한다. 그 중심에 다름 아닌 칼라일 그룹이 있다.<br/><br/>1999년, 금융위기에 처해있던 한국에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다. 2박3일의 짧은 일정 동안 그는 김종필 총리, 박태준 자민련 총재, 이헌재 금융감독원장, SK의 최태원 회장을 만나고 한라그룹과도 접촉했다. 부시가 떠난 후 칼라일 그룹은 한미은행을 인수한다. 그리고 2004년, 칼라일 그룹은 한미은행을 씨티그룹에 매각하고 6,200억 원의 차익을 챙겨 철수한다. 지금도 칼라일의 홈페이지 첫 화면은 한미은행 건물이 장식하고 있다. 칼라일로서는 ‘대박’이었던 것이다.<br/>이 일련의 스토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국부유출’의 문제가 아니다. 사모펀드였던 칼라일은 당시 국내법상 은행 대주주의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일은 유령 자회사와 JP모건의 계열사를 앞세워 결국 금감원의 승인을 얻어냈다. 금감원은 정말로 그 얄팍한 트릭에 속았던 것일까? 박태준 전 총리는 칼라일의 어드바이저였고, 칼라일코리아 회장이었던 김병주는 박태준 전 총리의 사위였다. 당시 국내에서 칼라일의 이권을 대변하던 집단은 ‘김&장’과 ‘법무법인 세종’으로, 외환은행 사태와 관련하여 소위 ‘이헌재 사단’과 함께 지금도 구설수에 오르는 로펌들이다. 이들은 지금 한국에서 전직 고위층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고스란히 칼라일 흉내를 내고 있다.<br/>이처럼 칼라일 그룹의 영향력과 그들만의 비즈니스 방식은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특별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칼라일 그룹은 전 세계를 무대로 몸집을 불리고 있고, 그들의 ‘초호화 캐스팅’도 계속되고 있다. 자본의 국적과 국경이 사라져버린 신자유주의의 시대, 이후 칼라일의 정치적ㆍ경제적 영향력은 미루어 짐작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