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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드리 노니다가

: 라종일의 탐미야담, 1983년 어느 가을밤, 젊은 정치학자 마음에 깃든 옛이야기

리뷰 총점9.3 리뷰 3건 | 판매지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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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160g | 118*188*10mm
ISBN13 9791186963692
ISBN10 1186963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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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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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끝없이 끌어당기는 힘이기 때문이지요. 아름다움이란 아마 근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내면적인 어떤 우아한 힘-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이지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일으키는 가장 중요하고 큰 힘은 그것이 우리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는 점이지요.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해 상상하게 해준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나약함, 보잘것없는 욕망, 초라한 소원, 허영, 속임수, 배신 등등, 인간의 특성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들을 다 포함해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경멸했어요. 그러나 용은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름다운 여인을 찬양한다는 같은 목적으로 뭉치고,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몰랐던 꿈을 꾸고, 그 꿈을 따라 현실 너머로 자신을 끌어올리고, 기어이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지상의 주인이요 중심이었던 거지요. 용이 본 것은 바로 그것이었어요.

소식이 퍼지자, 온 나라에서 몰려온 군중으로 바닷가는 갑자기 아름다운 여인을 잃은 슬픔으로 비통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리기 시작했어요.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어요. 어떤 사람들은 용을 달래고, 또 누군가는 애먼 바다를 향해 욕하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게다가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서는 거의 광란 상태에 가까운 절망적인 심정으로 노래를 불러대는 사람까지 있었답니다. 이 노래는 매우 불손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예전에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용은 이제 용이 아니라 미천한 거북이가 되었고 숭상과 아첨 혹은 기복의 대상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미녀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를 잡아서 구워 먹겠다’는 말까지 감히 나왔어요. 이 소동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어요.

여인이 존재했을 때 그랬던 것 이상으로, 그녀는 사라짐으로써 아름다움을 더 아프게 느끼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어요. 게다가 이제는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을 단결하게 만들었어요. 그들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의 진정한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지요.
---「1장 용과 미녀」중에서

이제 곧 설명할 그 중대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그의 결혼 생활에 전혀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요. 이 갈등이란 흔히 말하는 부부 사이의 사랑싸움이나 성격 차이 같은 게 아니라, 어떤 내적인 번뇌, 즉 처용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정신적 위기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처용은 때로 몹시 외로워 보였어요. 그의 외로움은 혼자 살 때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았어요. 아내를 안고 있는 거친 숨결의 감미로운 순간에도 왜 그리 마음이 괴로운지 그는 알 수가 없었어요. 겉보기에는 행복한 결혼 생활 중에도 가끔 혼자 우울한 상태에 빠져 있거나 일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걸 보았다는 이야기들도 나왔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걸 우연히 듣기도 했답니다.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자기한테 뭔가를 묻는 걸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사랑이란 뭘까?”
“가족이란 뭔가?”
처용의 이런 좀 유별난 행동이 그 뒤에 일어나는 그들 부부 사이의 갈등과 관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들 부부의 관계가 정확히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자기를 괴롭히던 의심이 바로 눈앞에서 사실로 확인될 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가 마주친 광경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육욕의 현장과 그로부터 생겨난 고통은 처용에게는 오히려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번쩍하는 한순간, 그는 그토록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너무나 오래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인간사를 짓누르고 있는 비참한 거짓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던 거예요.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이름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 우리 자신에게 불러온 고통들,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것이지요. 우리의 이기적인 집착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았어요.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는 것, 우리는 남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랑에는 이미 배신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어요. 내면의 빛과 함께 해방이 찾아왔어요.
---「2장 오쟁이 진 남자」중에서

전통적인 대가족 아래서는 보통 삼대가 함께 사는 데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친척들도 있고, 아예 들러붙어 사는 군식구들까지 있었지요. 게다가 수없이 많은 역할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효성스러운 며느리이면서 손주며느리인 데다, 사랑스럽고 품위 있는 아내이면서 집안 살림을 꾸리는 훌륭한 주부의 역할까지 - 여우가 사람이 되려면 이 모든 걸 해내야 했고,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따뜻한 엄마이면서 자애로운 올케여야 했고,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는 친절한 안주인이어야 했으며, 착한 이모, 고모, 기타 등등이어야 했어요. 그녀가 해내야 할 역할의 목록은 한도 끝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은, 자신의 동물적 감정과 행동을 억누르고 정숙한 부인처럼 행동해야 하는 마지막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3장 사람이 되기 위하여」중에서

모든 것은, 우리 인생의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 우연히 일어났어요. 사소한 사고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그런 우연이 없었어도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너무 당황하여 말문이 막힌 유리는 그 자리에 선 채, 그녀가 사라져 안 보일 때까지 멍하니 그녀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내 아버지는 누구지?”
“나는 누구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분마저도 아버지를 찾아서 한평생을 다 바치지 않았던가, 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이웃 인간들에게 전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분조차 적어도 한 번은 아버지에게,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울부짖으며 절망 속에서 손을 놓아버리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들이었어요.

그 수수께끼는 뭔가 불가능한 시험이나 시련, 즉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인 사람들 또는, 서로 견디기 힘든 무거운 책임을 진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진정한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르치는 잔인한 교훈 같은 것이었을까요?
수수께끼의 해답은, 삶의 모든 것이 그렇듯, 바로 등잔 밑에 있었어요.

무엇보다 유리는 그동안 자기가 찾아 헤매고 집요하게 매달렸던 문제 하나를 끝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해답은 바로 자기 눈앞에 있었건만, 그걸 보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이제 그는 또 다른 문제, 즉 자신의 운명을 찾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어요. 자기의 뿌리가 무엇이든 아버지가 남긴 징표의 신비가 무엇이든 간에,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아버지를 찾는 일과는 별도로 유리 자신이 해내야 할 새로운 문제였어요.
---「4장 아버지를 찾아서」중에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한 걸음 한 걸음씩 조만간 똑같은 먼지와 흙으로 되돌아갈 운명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마치 가슴에 번개가 치듯 모든 걸 뒤바꾸는 깨달음이 내게 일어났어.
불, 어둡고 뜨거운 불 - 인간을 만든 본질이자 실체인 그것. 하루의 힘든 노동을 마치고 뼛속까지 피곤에 절어서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나는 내 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어떤 뜨거운 것이 처음에는 배, 그다음엔 가슴, 마지막엔 머리로 솟구치는 걸 느꼈어.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불은 일어날 때처럼 빨리 사라졌어. 하지만 바로 거기서 그때, 내 안에서 서서히 타고 있을 이 불에 의해 어느 날엔가는 내가 깨끗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아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 전체도 함께. 그건 아주 짧은 순간적인 경험이었지.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익숙한 주변의 참기 힘든 광경들, 판에 박힌 나날의 농사일, 이런 것들이 한없이 지루해지고 가끔은 나를 완전히 미치게 만들곤 했어. 지난번과 똑같은 경험을 할까 봐 두려운 마음 반,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기다리는 마음 반, 내 마음속은 그렇게 불안하고 쉴 날이 없었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수 있는 휴화산처럼 내 안에서 우르릉거리며 들끓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지.

그건 내 전생의 일부, 영원히 뻗어 있는 무한한 시간 저쪽에서 시작된 나의 전생에 뿌리박힌 ‘업(業)’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단지 호기심이었을까? 어떤 경우든 간에, 내가 살그머니 머리를 들어 여왕의 행차를 잠깐 바라보았을 때, 여왕도 그 순간에 가마 밖을 바라보았어.
바로 그 찰나,
아마 한 호흡도 안 될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의 눈도 나를 포착했어.

그것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지.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절망 속에 찾아 헤매던 그 빛이 거기에 있었어. 불길이 서서히 내 안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어. 나를 평온하게, 차갑게 식혀주는 불. 그 불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나는 마침내 내가 차갑게, 자유로워지는 걸 느끼며 깊은숨을 들이마셨지.
---「5장 빛 없는 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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