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계엄-신문의 공간으로서 관동-오키나와의 연결에 겹쳐지는 또 하나의 폭력 현장, 그것은 3 · 11의 후쿠시마이다. 그런 연결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복구와 부흥을 위해 ‘삼국인三國人’의 사전배제 및 ‘자위대의 치안 역할’을 강조한 도쿄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 속에서 관동의 학살과 더불어 자기자신에게로 향해지고 있는 신문의 폭력을 예감했던 오키나와인 메도루마를 매개로 이뤄진다. 가능하고 필요한 한 가지 문답은 다음과 같이 된다. 왜 그렇게 겹쳐보는가, 왜 그렇게 연결하고 매개하는 겹눈의 시선이 필요한가. “버려진 국민[棄民]의 위치에서 국가의 무법을 감지함으로써 획득된 ‘바뀔 가능성이 있는 현재’[레베카 솔닛의 말]에, 굳이 말하자면 폭력의 예감과 함께 발견되는 미래를 향해 사람들이 연결되는 일을 고민하기 위하여”; “계엄령으로부터의 이탈 가능성을 다초점적으로 확장해 가기 위하여.
---「윤인로 - 오키나와로부터의 말, 테러/테라의 파르티잔주의: 로컬리티의 명명을 위한 하나의 시금석」중에서
또한 끊임없이 전체화하는 전체, 체계화하는 체계, 언어화하는 언어, 질서화하는 질서로부터 벗어나 주변과 지엽에 놓여있는 ‘자락’, 체계와 언어와 질서를 교란하고 착란시키는 ‘흔적’으로서의 ‘자락’ 역시 로컬의 부정성에 대한 사유와 연결된다. 자락은 모방의 장막을 찢고 그 물질성을 불현듯 상기시키며, 재현적 전체의 의미론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그림의 전체성, 종합성이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자락은 전체와 세부의 유기적 통일성과 재현적 질서를 교란시키고 와해시키는 이질적 요소로서, 하나의 틈이자 상처로 파열하며 갑작스레 신비를 열어젖힌다.
---「여문주 - 디디-위베르만의 ‘자락’과 ‘잔존’ 개념을 통해 본, 로컬의 이미지/이미지의 로컬」중에서
소설은 당시 대만사회의 자본주의 발전과 맞물려 미군의 휴양지로 선정된 대만에서 그들을 외화벌이의 대상으로 보면서 일어나는 각종 해프닝과 전쟁의 참혹함으로 인한 파월미군들의 심리적 상처와 대만여성과의 유대를 그린 내용, 그리고 반공과 애국정신 고취의 목적으로 베트콩의 악행과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현대시의 경우 주로 강렬한 이미지와 힘 있는 수사를 통해 반전사상과 인도주의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고, 베트남전쟁 당시에 창작된 고전시는 기본적으로 반공의 기조에서 베트남정부와 미국의 개입,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질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최말순 - 대만문학 속의 베트남전쟁」중에서
최성희, 엄문희, 황용운. 이들만이 아니다. 기후평화행진에서 우리가 찾아갔던 현장들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기에 찾아갈 수 있었다. ‘도청앞 천막촌 사람들’,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사람들’,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강정천을 지키는 사람들’, ‘성산환경을 지키는 사람들’, ‘용천동굴을 지키는 사람들’, ‘송악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서귀포시 도시우회도로 녹지공원화를 바라는 사람들’. ‘사람들’이라는 활동명은 이 모임들이 자발적 시민활동임을 보여준다. 시민단체도 주민조직도 아닌 시민들의 모임이 제주 이곳저곳에서 독자적이고 창발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윤여일 - 제주기후평화행진의 기록-최성희, 엄문희, 황용운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사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