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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02g | 130*200*16mm
ISBN13 9791193412527
ISBN10 1193412528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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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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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봉투를 뜯었다. 같은 서류인데도 목적이 바뀌어 있었다. 적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였다. 눈은 서류를 보고 있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글인데도 읽히지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글자가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글자의 그림자였다. 글자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나와 안개처럼 글자 위에 떠 있었다. 떠다니던 그림자들이 먹구름으로 변했다. 금방이라도 그림자들이 비로 변해 사무실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 pp.14~15 「대리인」중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진흙탕에 빠지는 심청이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눈처럼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던집니다. 하지만 심청이는 연꽃을 타고 세상에 다시 나오지만 내부 고발자는 그냥 진흙탕에서 질척거려야 합니다.”
공익신고센터 관계자와 통화한 내용이었다. 나는 짐을 챙겨 호텔 정문으로 나왔다. 예약된 택시가 내 앞에서 멈췄다.
‘연꽃도 진흙탕에서 피잖아요.’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택시 문을 열었다. 갈라파고스로 가서 핀치를 볼 것이다. 새로운 종의 기원이 되었다는 핀치가 너무 보고 싶었다.
--- pp.37~38 「대리인」중에서

주기적으로 머릿속의 통증이 나를 괴롭혔다. 생각이 생각을 만들고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내 뾰족한 해결책은 찾을 수 없었다. 대출금과 대출 이자에 공금까지,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지만 내게는 소화기조차 없었다. 휴학, 개인 회생, 파산 등의 단어가 어지럽게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 p.69 「팝업창」중에서

정신이 번쩍 든다. 잊지 말자, 나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하늘을 쳐다본다. 별들 사이로 달이 떠 있다. 주변이 환하게 달무리가 생겼다. 달아, 너는 알고 있잖아, 오늘처럼 그렇게 밝게, 밝게 진실을 밝게 비추어 다오, 손바닥을 맞대어 빌면서 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인다. 달빛을 받은 세상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
--- p.100 「기억의 침몰」중에서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이 지나갔다. 바닥에 나뭇잎이 떨어졌다. 무심코 보니 사람 얼굴이었다. 눈, 코, 입, 웃고 있었다. 아, 민우였다. 망가지고 찢긴 민우가 웃고 있었다. 놀라 일어서려고 나무를 잡았다. 어딜 잡아? 약점 잡아서 좋겠네. 나무줄기가 몸서리치며 서 교사의 손을 뿌리쳤다.
--- p.127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중에서

그날도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담양 본가에 있는 배나무에 앉아 있었다. 하얀 이화의 꽃잎처럼 날개가 바람에 하늘거렸다. 달착지근한 향기가 이끄는 곳으로 날개를 퍼덕였다. 어느새 죽녹원이었다. 짙은 녹색의 대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높은 가지에 앉았다. 살랑이며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숨결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 p.165 「덕봉 송종개」중에서

누군가 뇌를 손으로 잡고 찢는 것 같다. 감은 눈에서 번개가 치듯 빨간불이 번쩍인다. 통증이 내 몸 곳곳을 동시에 두드리고 찢고 공중에서 돌린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다. 깨어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 주먹에서 땀이 흘러나온다. 암세포가 동시에 미쳐 날뛰는 것 같다. 아, 그러지 마, 내가 죽으면 너도 죽잖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 p.199 「중첩」,쪽

조용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든다. 글자들이, 소리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포진하고 있다. 명령만 떨어지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할 것 같다. 옥상이라는 글자가 조금 움직인다. 맹렬한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어 팔에 박힌다. 따끔거린다. 신호라도 되는 듯 글자들이 나에게 일제히 달려든다. 팔을 휘저어 보지만 소용이 없다.
--- p.232 「딥페이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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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되었다. 대학 글터 동아리 지도교수로 현수 군을 만났다. 서슬서글한 문체답게 시원스러운 성정을 지녔다. “자네는 소설가가 딱이야”라는 한마디로 대학 전공을 바꾸는 전과자로 만들었다. 소설은 타락과 단절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라서 삶의 지옥도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그는 으레 그렇듯 싱긋 웃음을 날렸다. 눈과 입이 먼저 웃는 게 탈이었다. 착한 심성으로 꽤 오랜 시간 견뎌내었다. 악덕이 세상 사는 법이며 탐욕이 자본주의의 번영을 이끈다는 틈에 끼어 오가지 못하거나 잠식되는 인간, 그 아포리아의 세계를 천착하였다.

죽음에 맞선 투병의 심리적 정황을 찬찬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필력이 맵차다(「중첩」). 탄탄한 서사와 필력 강정으로 작가의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 군상과 세계상을 그려내었다. 진흙탕에서 질척거리는 신세로 전락할 내부 고발자의 말로를 알면서도 부정의 거대 담합 청부 카르텔에 맞서는 윤 과장(「대리인」). 거짓이 거짓을 증식하는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팝업창」). 기억에서 지워진 단절과 고독 혹은 기나긴 방황(「기억의 침몰」).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고 잠식하는 세계(「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사내는 가능하고 아녀자는 불가능한 세계에 맞선 당당함(「덕봉, 송종개」). 거짓을 참으로, 참을 거짓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리는 세계(「딥페이크」)에 내던져진 이른바 실존적 인간들이다.

손창섭의 1955년 작 「미해결의 장」이 분열된 주체로서 무능한 인간상을 보여 준다면, 노현수의 소설은 ‘나 안의 지옥’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상과 미궁의 세계상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살이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을 제시하는 아포리아의 정점에 노현수의 첫 소설집이 있다. 첫발을 내딛는 이 순간이 참 오래된 미래가 되기를 기원한다.
- 이성모 (문학평론가, 김달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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