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종교란 ‘인간이 물을 수밖에 없는 삶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관계에서 찾으려는 시도’ 정도가 되겠지요.
--- p.45
물고기는 물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 죽기 때문에 물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습니다. 물 밖에 나오기 전에는 ‘물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조차 실감할 수 없지요. 물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그것의 바깥으로(eks) 나와 서야(stasi)’만 합니다. 즉, 엑스터시가 필요합니다.
--- p.48
명상의 근본 원리는 의식을 집중해 모든 사고 작용을 멈추고, ‘지켜보는 의식’ 자체로 옮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이럴 때 일상적인 상태에서 알지 못했던 존재의 측면이 드러나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명상은 ‘내 밖에 선다’라는 의미의 엑스터시(ecstasy)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 p.59~60
경제적 풍요, 정치적 권리 향상, 교육 수준의 제고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종교 선택의 자유를 넘어서 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마저 전적으로 부여합니다. 그 결과 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습니다. 종교는 과거의 우월한 지위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의무를 처음으로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 p.73
만약 예수와 붓다가 숭고한 가르침을 전했지만, 그대로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기독교와 불교는 없었겠지요. 그러니 이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그걸 개개인이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는가가 종교의 최종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 p.99
종교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개별적으로 미치며, 이 과정에서 긍정적으로도 혹은 부정적으로도 작용합니다. 우리 삶을 행복하게도 혹은 불행하게도 만드는 것이지요. 결국 참된 종교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은 종교의 이상적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개인입니다. 특히 개인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결과입니다.
--- p.103
플라톤의 에로스는 성적 결합은 물론 궁극적 존재와의 합일을 이루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종교적이며, 더 정확하게는 신비주의적입니다. 그러니 플라톤을 그저 냉철한 이성만을 강조한 철학자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에로스의 접신’, ‘신적 광기’, ‘아름다움 그 자체의 비전’, ‘엑스터시’와 같은 다채로운 요소가 그의 철학에 가득하니 말입니다.
--- p.146
그들은 종교의 테두리밖에서 자신의 종교성을 직접 구현하려고 시도합니다.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믿는다(Believing without Belonging)’라는 표현이 이런 특징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우리의 경우 교회는 ‘안 나가’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을 ‘가나안’ 신도라고 부릅니다. ‘안 나가’를 재치 있게 뒤집어 표현한 것인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현상입니다.
--- p.192
영성은 제도 종교에는 속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물질적 차원을 넘어선 ‘더 큰 무엇’의 일부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태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것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개인의 열망과 노력을 포괄합니다. 현상 세계 너머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기존 종교와 궤를 같이하지만,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SBNR)’라는 표현 역시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지만, 제도 종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 p.193
명상은 자신과 존재 전체의 드러나지 않은 차원을 직관함으로써 더 큰 나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입니다. 그 외에도 더 큰 무엇과의 관계를 회복해 전일성을 확인하려는 다양한 영적인 추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더 큰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개인의 시도입니다.
--- p.212
비유적인 차원에서 보면 현대 사회 역시 ‘집단적 엑스터시’를 겪는 중입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정체성의 근본적인 변화와 확장을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결혼, 가족, 직업, 정치, 경제와 같은 모든 영역의 패러다임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립니다. 종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와 종교적 세계관이, 종교와 신비주의가, 종교성과 영성이 분리되었습니다.
--- p.214
우리는 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최근의 변화 자체에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움의 징후와 특성이 이미 거기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예컨대 종교 밖에서 더 큰 차원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뚜렷한 특징 말입니다. 특히 이 흐름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지향점은 다름 아닌 삶의 행복입니다.
--- p.217
모든 종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여전히 있다고 끊임없이 역설합니다. 나의 무지를 인식하고, 앎의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 둘 때 그 미지의 차원이 드러납니다. 그때 나는 내 밖에 서는 엑스터시를 비로소 경험합니다. 이 사건을 위해서는 미지의 것이 드러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또한 엑스터시는 지금껏 몰랐던 확장된 정체성은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경이로움도 알려 줍니다.
--- p.262
종교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려면 과거의 종교는 죽어야 합니다. ‘무종교의 종교’, ‘종교를 넘어선 종교’와 같은 역설적 표현들은 ‘불사조(不死鳥)’가 그러하듯 과거의 종교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죽음이라고 표현되듯이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탈피가 필요한 것이지요. 애벌레가 고치를 벗어 던진 후에야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