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팅은 이제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필요하다. 상품, 지식, 뉴스, 데이터, 브랜드, 콘텐츠 모두 현기증 날 정도로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주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하는 일도 벅차다. 자신의 취향, 호기심, 판단력을 알고리즘에 외주 주거나 타인에 대한 모방으로 때우는 일이 빈번해진 이유다. 모든 것이 이미 이렇게 많은 세상이라면 그 안에서 어떻게 자기다움이나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부터 기존 재료로 인지적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편집 능력이 중요해진다.
---「프롤로그」중에서
단어를 많이 모아놓은 사전이 곧 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우표 수집가의 아카이브를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무언가를 모은다고 곧장 창조적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방점은 ‘모으기’가 아니라 ‘알아보기’에 있다. (...) 그렇다면 재료의 의미화 가능성을 알아보는 좋은 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조각을 미술관에서 줍는다.
---「01 재료 수집」중에서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인지심리학 개념이 있다.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환경 안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뇌의 기능을 뜻한다. (...)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내가 산 모델이 갑자기 길에 많아진 기분을 느끼는 것, 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장만해야 하면 어딜 가도 가구만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같은 맥락의 인지 작용이다. 비슷한 원리로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짚어준다. 질문을 품고 있으면 정보는 딸려온다. 질문이 자석이라면 정보는 철가루다.
---「02 연상」중에서
범주화는 우리 뇌가 정보와 세상을 인지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 우리는 길에서 낯선 고양이를 만나면 ‘고양이’라고 부르고, 머릿속 ‘고양이’ 서랍에 그 친구를 배정한다. 그 덕분에 새로 만난 털북숭이 역시 생선을 좋아할 것이고, 발톱이 날카로울 것이고, 경계심이 많을 것이고, 기분이 좋을 땐 골골송을 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기존에 가진 앎의 체계(머릿속 서랍들) 덕에 새로운 대상을 빠르게 이해한 것이다.
---「03 범주화」중에서
다수와 무난하게 소통하기 위해 정리하는 편집도 있고, 전에 없던 새로운 의미나 심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편집도 있다. 무엇이 설득력이 낮다 높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개별 프로젝트의 목적과 수용자 성향이다. 자신이 수행하는 선택과 배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하는지 정확한 목적지를 찍고, 상황에 맞춰 정보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것이다. 익숙함과 명확함, 낯섦과 모호함이라는 두 원소를 손에 쥐고 목적에 맞춰 적정 배합 비율을 찾아내는 일. 나는 그것이 에디팅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04 관계와 간격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결국은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이 질문이 에디토리얼 씽킹의 핵심 중 하나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는 더이상 원천적이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획이 새로운 것 같아도 조금만 검색해보면 이미 비슷한 결과물이 나와 있다. 레퍼런스는 무한대다.
---「05 레퍼런스」중에서
“이 콘텐츠를 본 사람이 마지막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품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도 자주 던진다. 어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이 콘텐츠를 보길 원하는가?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거나 영상 재생을 멈출 때 그들에게 어떤 감정이 남기를 바라는가? 놀라길 바라는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길 바라는가? 부조리에 분노하길 바라는가? 잘 쉬었다는 느낌을 얻길 바라는가? 긴장감을 느끼길 바라는가? 창작욕을 불태우길 원하는가? 이렇게 수용자 자리로 건너가 아등바등 감정이입하면서 그들 머릿속에 담아주고픈 알맹이를 발견한다.
---「06 컨셉」중에서
이건용 작가는 장소와 의미가 어떻게 긴밀하게 관계 맺는지 보여준다. 단행본 책 한 권이 서점 매대에 있을 땐 ‘상품’, 유통 창고에 있을 땐 ‘재고’, 쓰레기장에 있을 땐 ‘종이류 쓰레기’, 공공도서관에 있을 땐 ‘장서’, 작가나 독자의 품에 있을 땐 ‘작품’으로 의미가 바뀌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렇게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정보의 의미를 유연하게 다룰 줄 아는 생각의 힘이 바로 에디토리얼 씽킹이다.
---「08 프레임」중에서
창작을 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주장으로 도약해야 한다. 어떤 정보를 취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지 선택하고, 그 결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야 한다. 자신이 전방위에서 수집한 정보가 모두 동일하게 의미있다고 여긴다면 무엇도 주장할 수 없다. (...) 글쓰기, 편집, 창작은 오류를 없애는 작업이 아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음에도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 입장을 밝히는 일, 오류를 품고 프레임을 치는 일이다.
---「10 생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