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 올바르게 사고해야 할 필요 자체에 주력하는 유일한 학문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다른 모든 학문에는 의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구가 있다. 과학자에게는 실험이, 경제학자에게는 자료가, 인류학자에게는 참여 관찰이, 역사학자에게는 문서가, 고고학자에게는 유물이 있다. 하지만 철학자를 위해서만 특별히 저장해 둔 특수 정보란 없다. 철학에는 의지할 도구가 없는 셈이다. 다만 철학자들은 어떤 안전망도 없이 생각하는 독특한 능력을 배운다. 전문 지식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사유를 하는 방법을 원한다면 철학보다 더 나은 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이 ‘명석한 사고’를 가르쳐주는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제대로 사유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자처럼 생각해 보라는 권유를 하면서 그 과제가 어렵다는 사실을 숨긴다면 그건 정직하지 못하다. 사유가 어렵지 않다는 식으로 사탕발림이 지나치면 결국 영양분 없는 싸구려 과자를 집어 먹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시간에 쫓기는 관심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싸구려 지식의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지름길, 시간 절약, 인지 가속기를 원한다. 이러한 사유는 지나치게 빨리 효용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 바람에 쓸모없다며 잘라내 버린 것들로 인해 오히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싸구려 지식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통째로 잘라버려야 한다. 사유를 지금보다 더 쉽게 하려 들지 말고 제대로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들어가며 철학하는 습관으로의 초대」 중에서
질문을 던지는 행위를 본래 부정적으로 여기는 까닭은 아마 회의론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의문 제기’는 의심하고 문제를 설정하는 행위다. 의심과 문제 설정을 위한 질문은 철학 교육에서 장려된다. 하지만 나쁜 논증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온통 정신을 쏟다 보면 자신이 찾아낸 증거에 정신이 팔려 좋은 논증까지 놓칠 수 있다. 잘못된 것만 보다 보면 정작 올바른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예를 들어, 나는 유기농 식품이 우수하다는 주장에 항상 의구심을 품었다. ‘유기농’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다 보면 개념의 결함과 한계가 훤히 드러난다. 유기농과 비유기농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연에서 났는지가 아니다. ‘유기농’이라는 라벨의 사용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개발한 기준에 따른다. 어떤 농부가 유기농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이웃과 똑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더라도 인증 비용을 내지 않으면 그 식품은 유기농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일부 식품은 100퍼센트 유기농 재료로 만들었지만 법적으로 유기농이란 라벨을 붙일 수 없다.
--- 「2장 질문 | 당연해 보이는 주장이어도 질문하고 의심하라」 중에서
도덕적 동정심에 대한 합리적 정당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흄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아직 그 누구도 도덕성에 관해 순전히 합리적인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인식하는 능력이야말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도덕적 동정심이 아예 없다면 아무리 설득한다고 해서 그것을 느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6장 확장 | 사유의 폭과 깊이의 균형을 맞추라」 중에서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육식은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육류는 식물과 비교했을 때 같은 칼로리를 생산하기 위해 항상 더 많은 토지가 필요하므로 육식은 비효율적인 자원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명한 사실처럼 보이며 중요한 단서다. 이 문제가 그렇게 자명하다면 지적인 사람이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생각이 깊은 육식 옹호자들이 이 주장에 대응하는 논증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논증은 있다. 고기를 생산하는 동물을 기르는 많은 방목지는 사실 경작에 부적합하다. 동물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식품 폐기물을 먹이로 삼을 수 있다. 이 반론은 환경을 위해 우리 모두가 채식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좋은 논거가 될 수 있다. (동물 복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러나 육식 옹호자 역시 자비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최악의 논거에 대해서는 승리를 거두었을지 모르지만 최고의 논거에 맞붙어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적어도 일반적인 육류 산업은 사람도 먹는 식물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에서 사료를 길러 가축들에게 주고 있다. 그러므로 육류 산업 일반에 대한 옹호론은 분명 성립될 수 없다.
--- 「8장 통찰 |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여러 각도에서 파악하라」 중에서
그레일링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철학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만용입니다. 철학자라는 칭호는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 다른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는 칭찬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철학을 한 번도 공부해 본 적도 없고 가르쳐본 적도 없으며 대학 근처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 진정한 철학자가 많습니다.” 반대로 전문으로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는 철학자가 전혀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철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철학자가 되어가는 일이다. 그러려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 절대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절대로 안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말이 절망스럽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평화로운 안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안다. 안주는 죽음이다. 불안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뜻이다.
--- 「12장 집념 | 포기하지 않는 성격은 좋은 생각의 원천이다」 중에서
직장을 때려치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다녀야 하나? 직장을 관두는 선택의 결과는 대개 불확실한 반면 직장을 그만두지 않을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비교적 확실하다. 직장이 괜찮다면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직장이 정말 싫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만두었을 때의 불확실성이 커다란 재앙도 아닌데 왜 그만두지 못할까? 답은 간단하다. 불확실성 자체가 두렵기 때문이다. 철학은 불확실성에 과도한 불안을 느끼는 불확실 공포를 길들이는 데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철학은 답을 제시하더라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철학은 불확실성을 감내하고 사는 기술, 최종적인 답 없이 사는 기술,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위대한 교사다.
대답이 없을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하는 것, 절대적인 확실성 없이 명확성을 더욱 추구하는 것, 올바른 대답을 얻기보다 실수를 고칠 준비를 하는 것을 포기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일에 착수하기 위해 반드시 희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은 어떤 보장도 주지 않기 때문에 보장이 없어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시도를 해보기 위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패가 불가피하다는 것만 믿지 않으면 된다.
--- 「12장 집념 | 포기하지 않는 성격은 좋은 생각의 원천이다」 중에서
이 책의 모든 조언은 대부분 주의력의 실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증거에 주의하기, 중요한 것에 주의하기, 추론 단계에 주의하기, 말하지 않은 가정에 주의하기, 사용하는 언어에 주의하기, 다른 전문가나 학문이 기여해야 하는 바에 주의하기, 정신의 속임수에 주의하기, 자신의 편견과 기질에 주의하기, 자신의 자아, 더 넓은 그림, 거대 이론의 유혹 등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대단히 많다.
--- 「나오며 중용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배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