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야기다. 칼이야기다. 사람과 사랑이야기다. 한 여인을 동심원으로 꽃과 칼과 사람들이 불꽃처럼 일이며 써 내려간 역사이야기다. 한 송이 작은 들꽃이 유라시아 대륙을 품을 때 까지 겪은 아픔과 기쁨과 쓸쓸함과 영광의 기록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흔들리며 마침내 맨 밑바닥에 놓던 자기 삶을 수직으로 끌어올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신화이야 기다. 그리고 어느 날 초원의 바람처럼 홀연히 역사 속에서 사 라진 여인을 다시 만나는 일이다.
--- 1권 p6 저자서문, ‘바람과 초원의 딸을 만나기 전에’ 에서
아, 어머니. 불쌍한 내 어머니.
혜린은 한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이제 종지만큼 부푼 젖무덤 사이에 놓인 보따리는 아직도 엄마의 온기가 배어있는 듯 따듯했다. 그 보따리 속엔 엄마의 냄새와 온기뿐 아니라, 혜린이 가장 찬란하게 겪은 시간과, 그 시간의 흔적들이 묻어있는 물건이 들어있었다.
색동저고리 두 벌과 토우였다. 무지개색 색동저고리는 혜린이 집을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을 때 내준 것으로 두 벌이었다. 하나는 혜린의 세 번째 생일날 생일빔으로 엄마가 만들어준 것으로 혜린의 가장 오랜 기억에 닿아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그녀의 체격보다 조금 넉넉하게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 쌍의 토우는 공출선에 오르기 직전에 사량이 정표로 준 것이었다,
혜린은 배에 오르기 직전에 엄마를 껴안았듯이 보따리를 세게 끌어 당겼다. 아쉽고 아쉬운 행주에서의 마지막 밤의 여운이 아직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밤은 혜린도 울고 엄마도 울고 행주산성의 산새도 울고, 그 슬픔 기척에 한강물도 제 몸을 출렁이던 밤이었다.
“혜린아, 원래 이 옷은 네가 시집갈 때 주려던 옷이다. 너의 세 번째 생일날, 이 색동저고리를 입은 네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네 곁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지. 마치 전설 속 설산에서 향기만 먹고 산다는 천상의 새 가릉빈가처럼 그렇게 고왔단다. 그래서 고이 간직해두었던 거야. 그런데…… 아무튼 잘 간직해라. 엄마가 그리우면 이 색동저고리를 꺼내보고…… ”
그쯤에서 이씨부인은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대도까지 입고 갈 옷이라며 또 한 벌을 내놓고 다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한번 입어 보거라 엄마, 앞에서.”
“예, 엄마.”
혜린은 엄마가 그 옷을 어떤 마음으로 지었을 것인지 잘 알기에 조심스럽게 입었다. 옷은 너무도 잘 맞고 잘 어울렸다. 색상도 색상이지만 어깨 폭이며 허리 품이 딱 들어맞아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았다.
“야아, 우리 딸이 최고다. 이 엄마가 한양부에서 내로라하는 집 딸들을 다 봤지만 오늘 비로소 고려 최고의 미인을 보고 있구나!”
이씨부인이 경탄의 눈빛을 하고 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엄마.”
“혜린아, 그동안 이 엄마가 얼마나 너에게 예쁜 여자 옷을 입히고 싶었는지 아느냐. 주섬주섬 사내 옷을 입은 너를 보면 가슴이 도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알아요, 엄마. 모두 저를 위한 일이었잖아요.”
“그래, 그랬다. 이 어민 너를 공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 작은 색동저고리를 입혀본 뒤로는 남장을 시켰지. 너랑 같이 살고 싶어서. 우리 땅에서 머루랑 달래랑 먹으며 너랑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랬는데, 결국엔…… 흐흑!”
이씨부인이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옷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또 한 벌은 나중을 위해 지은 옷이다. 좀 넉넉하게 지었으니 네가 가장 입고 싶은 날 입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 색동저고리처럼 아름다운 무지개의 나라, 고려국의 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알았니? 혜린아!”
“예, 그럴게요, 엄마.”
혜린은 목이 메어 간신히 대답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엄마의 볼에 얼굴을 가져가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한 점으로만 남아있던 대청도가 돛대의 끝처럼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혜린은 까치발을 딛고 그 땅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마침내 푸른 하늘 끝에 매달려 있던 점하나가 바다 속으로 뚝 떨어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푸른 바다와 그 바다에 은비늘을 일으키고 있는 바람, 그리고 대청도서부터 쫓아 온 갈매기 한 마리만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때부터 혜린은 보따리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울음이었다. 그동안 도망을 다니며 참았던 울음이고 청산별곡이 선상을 울릴 때도 내보이지 않던 울음이라 그 울음은 깊고도 길었다. 그 울음은 단지 설움에 겨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칠정(七情)이 위없이 지극해져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암사슴의 눈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쏟아져, 일부는 서해바다의 구름이 되고 또 일부는 보따리 속 색동저고리와 토우를 적시고 있었다.
때 아닌 혜린의 큰 울음소리에 지쳐 조용해진 동녀들도 다시 울기 시작하고, 놀라 뛰쳐나온 환관들이 눈을 부라렸지만 혜린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선상에서 눈물의 축제를 이끌며 울고 또 울었다. 예성강 나루까지 배웅 나와 토우를 주고 배가 뜨는 것을 지켜보던 사량의 얼굴이 파도에 떠내려 갈 때까지 혜린은 몸부림을 치며 오래오래 울었다.
어느새 배가 직고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제야 울음을 그친 혜린은 뱃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두려움에 맞설 때처럼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중국 대륙이 서서히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미지의 땅, 초원의 대제국, 원나라 땅이 눈동자를 지나 그녀의 가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고, 설렘이고, 거대한 뭔가가 자신의 몸을 향해 몰려드는 듯한 기대감 비슷한 감정이었다. 혜린은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전율처럼 전신을 쓸고 지나가는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잘 몰랐지만, 먼 훗날 그녀는 이 순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전설적으로 전개될 그녀의 앞날을 알리는 전조 같은 거였다.
그때서야 대청도서부터 배를 따라왔던 갈매기가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날아갔다. 마치 한 마리 새로 변신한 사량이 뱃길을 끝까지 지켜보다 안심하고 돌아간다는 듯 혜린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혜린은 눈앞에 펼쳐진 뭍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숨을 크게 한번 들이 마셨다. 초원에서 이어진 중국대륙의 첫 공기가 혜린의 허파 깊숙이 들어왔다. 혜린은 허파 가득 숨을 가두고 크게 외쳤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 품에 있을 때보다 더 안 울겠습니다. 생각을 깊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한만큼 행동을 더 야무지게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 품속에서보다 더 많이 웃겠습니다. 생동저고리를 입을 수 있는 그 날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꼭 돌아가겠습니다. 솔롱고스 무지개가 아름다운 나라로요. 꼭요!”
----1권 p 255-237
오월 초, 맑은 햇살 아래 경화도는 싱그러웠다. 이슬에 젖은 잔디 위에 쏟아진 햇빛이 아지랑이를 피워 내며 골 이랑으로 출렁였고, 산들 바람이 불 때마다 살찐 나뭇잎 위에 얹혀있던 햇빛이 허공을 차며 태액지 수면에 내려앉아 은비늘을 일으켰다.
혜린은 차 주전자를 옆에 놓고 정자 아래 수면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요하고 투명한 날이었다. 햇살이 은비늘로 부서지는 수면 위는 찻잔 속처럼 맑고 고요했다. 너무 잔잔하여 세상의 소리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 수면에 대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고, 물위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면 바로 일어날 것도 같았다. 망중한이란 이런 것인가. 고요한 마음이 가장 깊은 바닥에 이르자 그녀의 입안에서 저절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그동안 혜린은 황제를 두 번 가까이서 보았다. 많은 사람이 함께 했던 자리였다. 그때 황제는 바쁘고 경황이 없어 보였다. 알맞게 달군 보이차를 냉수 마시듯 벌컥 들이킨 게 고작이었다. 황제가 하명하기 전엔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게 황궁의 법도여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흘러간 조우였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리 얄리 얄라성
얄리얄리 얄라성 얄리 얄리 얄라성
혜린은 고려노래를 끝내고 황궁에서 배운 몽고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갈색 대지가 흙 덩어리만할 때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개울만할 때부터
잊은 것을 깨우고
잠든 것을 깨워
그러자, 하는 동무
갈색 말의 채찍이 되어
그러자, 할 때 아니 늦고
대오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며
긴 정복전에 원정 나가고
짧은 전투에서 함께 싸우겠습니다
낮고 고운 혜린의 목소리가 해맑은 햇빛에 실려 정자 밑 호수의 푸른 물위로 낮게 퍼져나갔다. 향기를 품은 듯 고운 목소리였다. 사람의 혼을 가만히 흔드는 감미로움이 스며있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것이기에 그녀의 몸안 깊이 잠겨있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목소리였다.
“너는 고려국에서 온 아이구나!”
고려국! 고려국에서 온 아이냐고? 혜린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듯한 그 목소리에 수면에 던져 놓았던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황제가 연춘각과 경화도를 잇는 연육교 앞에 서 있었다. 혜린은 얼른 입을 다물고 다가오는 황제로부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아, 그런데 그 순간 어린 황제가 왜 그리 커 보이던지, 혜린은 어린 황제가 엄청난 등치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듯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혜린이 한 발짝 더 물러나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았다. 정말 두렵고 황망한 일이었다. 경화도 정자에 납실 거라는 편전 시녀의 전갈을 받고도 맥을 놓고 있었다니. 그런데 그때다. 황망함에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감는 순간 그녀의 화사함 뒤에 숨어있던 엷은 우수가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고, 황제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황제로서는 익숙하고 친근한 이미지였다. 대청도 앞바다에서 초원의 아버지를 그리며 자기가 짓곤 하던 바로 그 우수다. 다시 혜린의 얼굴에 복숭앗빛 화사함이 드러나자 황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 궁녀야. 아버지 어진 곁에 서 있던, 궁녀. 수호신 아라한 불상을 닮은 바로 그 궁녀. 두 사람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시 마주쳤다. 순간 심장의 판막을 울리는 전율이 일었다. 좋은 것,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 그리고 슬픈 것 앞에 섰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신 안에 보물처럼 그려 넣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 황제의 눈앞에 있었다.
“괜찮아, 부르던 노래를 마저 부르렴, 참으로 듣기 좋구나!”
황제는 언젠가 자기 귀를 활짝 열게 했던 노래를 다시 들었다. 대청도에서 유배의 한을 달래주던 노래였고, 푸른 바다를 건너 온 흰 사슴 한 마리가 자신 품에 파고드는 꿈을 꾸게 한 노래였다. 황제는 혜린이 노래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감미로운 꿈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듣고 있었다. 황제는 이미 자기 안에 살던 오랜 동무를 비로소 만나고 있었다.----1권 p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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