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냐고요?」 아르까디가 가볍게 웃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싶으세요, 큰아버지?」 「그래, 말해 주렴.」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예요.」 「뭐라고?」 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되물었다. 날 끝에 버터 한 조각이 올라앉은 빠벨 뻬뜨로비치의 칼이 잠시 허공에 멈췄다. 「니할리스트라고요」 아르까디가 재차 말했다. 「니힐리스트라.」 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무를 뜻하는 라틴어 〈니힐nihil〉에서 나온 말이로구나. 그러니까 니힐리스트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지.」 빠벨 뻬뜨로비치가 덧붙이고 다시금 빵에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르까디가 설명했다. 「결국 마찬가지 의미 아닌가?」 빠벨 뻬뜨로비치가 물었다. 「아니, 마찬가지는 아닙니다.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고 제아무리 존중받는 원칙이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게 좋다는 말이냐?」 빠벨 뻬뜨로비치가 끼어들었다. ---p.36~37
「……책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시대의 요구 수준에 맞추려 애쓰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제 시대가 이미 지나갔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형님, 전 그게 맞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건 또 왜지?」 「이런 일 때문이지요. 오늘 전 뿌쉬낀을 읽고 있었어요. 〈집시〉 부분을 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르까디가 말없이 다가오더니 애정과 연민이 어린 표정으로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제게서 책을 빼앗고는 다른 무슨 독일 책을 놓아 주더군요…….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나가 버렸어요. 뿌쉬낀은 가져가고요.」 「아니, 대체 무슨 책을 주더냐?」 「이 책입니다.」 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코트 뒷주머니에서 뷔히너의 그 유명한 책 제9판을 꺼냈다. 빠벨 뻬뜨로비치는 책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그래요, 형님. 이제 관을 주문하고 가슴에 손을 포개 얹을 때인가 봅니다.」 니꼴라이 뻬뜨로비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난 그렇게 빨리 포기하진 않겠어.」 빠벨 뻬뜨로비치가 중얼거렸다. 「그 의사 놈하고 한 판 붙어야지. 곧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 그 한 판은 바로 그날 저녁 차 마시는 자리에서 벌어졌다. ---p.72~73
「빠벨 뻬뜨로비치가 저를 이길 것 같으면 제 편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편을 들겠어요? 게다가 당신을 이길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절 때려눕힐 손도 있는데요.」 「그게 어떤 손이지요?」 「정말로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주신 장미가 참으로 향기롭군요. 한번 맡아 보시지요.」 페니치까가 목을 길게 빼고 꽃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머릿수건이 흘러내리면서 윤기 흐르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가 약간 흐트러진 채 드러나 보였다. 「잠깐만요, 저도 함께 향기를 맡고 싶군요.」 바자로프는 이렇게 말하더니 허리를 굽히고 페니치까의 벌어진 입술에 힘껏 입을 맞추었다. 페니치까는 몸을 떨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힘은 약했고 바자로프는 다시 긴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라일락 뒤쪽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울렸다. 페니치까는 황급히 벤치 반대편 끝으로 물러났다. 빠벨 뻬뜨로비치가 나타나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미움과 냉소가 섞인 투로 〈여기들 있었군〉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페니치까는 바로 장미꽃을 챙겨 정자에서 나가 버렸다. 나가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라고 속삭이기는 했다. 그 속삭임에는 진정 원망과 비난이 담겨 있었다.---p.222~223
(……) 사흘쯤 지났을 때 바자로프가 아버지 방으로 와 질산은이 있는지 물었다. 「물론 있지.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좀 필요해서요……. 상처를 지지려고요.」 「누구 상처를?」 「제 상처요.」 「뭐라고, 네 상처라고? 어떻게 된 거냐? 어디 상처가 난 거야?」 「여기 손가락에요. 오늘 그 장티푸스 걸린 농부 마을에 다녀왔어요. 시체를 해부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오랫동안 실습을 해보지 않았고요.」 「그런데?」 「군 공의에게 부탁해 해부를 하다가 좀 베였어요.」 아버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서재로 달려가 질산은 조각을 쥐고 돌아왔다. 바자로프는 질산은을 받아 들고 나가려 했다. 「오, 맙소사.」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해주마.」 바자로프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정말 진료를 좋아하세요!」 「제발 농담은 말아라. 손가락을 좀 보자. 상처가 크지는 않구나. 아프지 않니?」 「더 세게 눌러 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으니.」 욾버지가 손을 멈췄다. 「어떠냐, 예브게니, 쇠로 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려면 진작 했어야죠. 사실 지금은 질산은도 별 소용없어요. 만약 감염이 됐다면 벌써 늦었으니까요.」 「뭐……. 늦었다고…….」 아버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