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솟은 지 오래인데 고구려는 아직도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이(東夷)가 하늘백성으로서 조선을 세우고 구이(九夷)의 우두머리가 되어 온 누리를 다스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일 뿐이다.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다고 으스대지만 서토에서 춘추전국의 난장판이 벌어져도 저들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었고, 진시황이 땅을 넓히며 포악을 떨던 시절에는 오히려 조선이 망하고 부여가 일어나지 않았느냐? 부여 밑에서 일어난 고구려도 한나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못하다가 한나라가 망한 뒤에야 비로소 슬그머니 손을 뻗쳤고 작고 힘없는 나라들에 대해 다물 운운했을 뿐이다. 서토는 이제 우리 수나라 하나로 뭉쳐졌다. 더는 조선이니 뭐니 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고구려의 다물이라니? 개수작 말라고 해라! 나는 아직도 잠꼬대를 하고 있는 태왕을 쳐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가르쳐주겠다.”
양견의 의지는 분명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는 법! 건곤일척, 오직 운명을 건 사투뿐이다! (19쪽)
“좋은 칼을 가지면 그 날카로움을 시험해보고 싶고 좋은 갑주를 걸치면 싸움터에 나가고 싶기 마련이다. 안주총관, 그대는 그 병장기들로 그대의 용맹을 빛내고 다시는 고구려와 싸우자는 소리는 하지 말라. 고구려를 다시 입에 올리는 자는 우리 수나라를 말아먹을 역적이다. 그 누구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려라. 역적의 목을 자른 자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양견은 전란 속에서 날을 지새우며 서토를 평정한 뛰어난 병법가였다. 여동에 가서 고구려군의 무서운 위력을 실제로 겪은 뒤에는 그 대처방법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셈이었다. (56쪽)
“어떤 귀한 집 자식이건, 얼마나 호강하며 살았건, 여기서는 모두 잊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조선나라 고구려의 선배로 태어나야 한다. 젖먹이 응석받이가 아니라 어디서고 당당한 사나이로 거듭나는 것이며, 무뢰한이 아니라 고결한 선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수련이 힘들거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한 번 떠난 자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124쪽)
“진왕께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뒷받침할 신하가 없으면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아무리 사람을 얻으려 해도 이쪽의 힘이 크지 않으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등을 돌리려 할 것이니 먼저 힘센 장수를 얻어야 합니다. 군사를 몰아 싸우는 것이라면 우중문도 좋을 것이나 황태자가 되는 것은 들에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멧돼지 같은 우중문보다는 모든 벼슬아치가 믿어마지않는 안주총관 우문술이 필요합니다.” (156쪽)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고구려 군사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은 신하들끼리도 고구려를 입에 올리지 못하게 금했다. 평소에는 너그럽고 부하들의 말도 귀담아듣지만 고구려에 관해서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창끝처럼 매섭다. 고구려는 왕의 역린(逆鱗)이다. 섣불리 입에 올렸다가는 정말 목이 달아날 것이다.
용은 사나운 영물이지만 아무나 올라타는 사람이 주인이다. 누구나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다. 그런데 용의 목에는 거꾸로 달린 비늘이 하나 있다. 이 비늘을 건드리는 자는 누구든 곧바로 물어 죽인다. 제 등에 올라타 저를 부리는 주인일지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166쪽)
---본문
“사나이로 태어나서 그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 김유신은 신라 으뜸 화랑인 국선화랑으로서 반드시 고구려의 으뜸장수 을지문덕을 앞서고야 말 것이다!”
견디다 못해 이를 악물고 뜻을 세웠으나 아직 나갈 길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으로 을지문덕을 앞지른단 말이냐?”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화두였다. 그러나 김유신이 할 일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를 아우르는 것이다! 아아, 삼국통일!”
국선화랑 풍월주 김유신은 스스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감히 꿈꿔보았겠는가? 나 김유신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리라!” (12쪽)
병법은 파고들수록 재미도 있었다. 성안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 적을 제 발로 걸어나와 죽게 하고, 걱정 없이 잘사는 나라를 들쑤석거려 제 편의 창받이로 이용할뿐더러, 상대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까지 쓰여 있었다.
싸움터의 모양을 살펴 이로움을 얻어라! 힘을 써서 적을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겨놓고 싸워라! (19쪽)
“우리가 싸울 때마다 크게 진 것은 당연했다. 무엇 하나 나은 것이 없는데도 군사가 많은 것만 믿고 덤벼들었으니,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장군님은 우리를 하룻강아지로밖에 보지 않으십니까?”
이세민은 약이 바짝 올랐다. 그렇게 나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싸움에 지는 게 아닌가.
“세민아, 대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귀를 씻고 잘 들어라.”
이정의 얼굴이 무서워졌다.
“우문술 대장군이 어째서 많은 장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아느냐? 자신을 잘 알고 적을 업신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록 수십만 군사로 장성을 지키고 있지만 끝까지 저들을 막기는 어렵다. 더구나 나라 곳곳에서 도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60만 군사는 한 사람도 도둑들을 잡으러 가지 못한다. 이제 우리 수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저들이 하루빨리 성을 쌓고 물러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173쪽)
도읍을 평양에서 국내성이나 졸본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한 뒤부터 을지문덕은 조정 벼슬아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재물이 많은 사람도 근거지를 떠나면 힘을 잃게 된다. 평양에서 세도를 부려온 귀족들은 평양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겨레와 나라의 운명보다 제 사사로운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소인배들! 을지문덕은 정신이 썩어 있는 소인배들과는 더 말해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쇠귀에 경 읽기’라더니, 그런 소인배들과의 말씨름으로 한 해가 지난 것이다. (177-178쪽)
“백성들은 ‘아무리 강한 용도 그 지방의 뱀은 건드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이곳에 와서까지 어쩌양광을 버렸습니다. 두 번씩이나 조선에 죄를 지은 양광을 밝은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군사가 무섭다는 것도, 백성들의 입이 무섭다는 것도 잘 안다. 하나, 대장군 우문술을 모르느냐? 그가 데려온 40만 군사를 잊었느냐? 대장군 우문술의 손에 걸리면 서토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206-207쪽)
“가르침을 어찌 내게서 얻으려느냐? 온 누리가 다 너의 스승인 것을.”
스승의 말은 어린 제자에게 너무 어려웠다.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뿌리가 땅의 기운을 빨아올리고 줄기는 하늘을 받치며 잎은 햇빛과 이슬을 머금어야 한다. 그렇게 때가 이르렀을 때 비로소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 일어나 가거라. 때가 되면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스승은 여기 인연은 끝이 났으니 다음에는 하늘못으로 올라가라며 몇 가지 일러주었으나 어리석은 제자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눈 속에서 피는 꽃나무는 봄부터 여름, 가을을 준비하고 겨울을 견디었던 것이다. 그 때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322쪽)
“네가 배달로서 두레에 나가 배운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나, 옛적 물계자가 하늘숨을 쉬는 배달다운 싸울아비가 아니었는가 한다. 그저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서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싸울아비는 아닐 것이다. 자기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한낱 칼잡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굳이 싸울아비라고 할 까닭이 없다.”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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