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논항의 제약기반 분석과 의미론적 제약*
김 광 희광양보건대학교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한국어 영논항(null argument)의 실현 유형을 분석하고, 기왕의 연구들을 재검토하여 한국어 영논항의 지시 결속을 비변형적 방법과 의미론적 제약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연구에서는 영논항이 통제자 내지 지시적 선행사와 일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속(binding)의 시각으로 접근하며, 결속과정을 변형이론의 관점이 아닌 의미론적 제약을 활용한 비변형적 통합론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특히 문맥이나 상황 속에서 통제자를 찾아야 하는 이른바 주어나 주제 영논항과 같은 경우 대용어에 적용되는 결속이론에 따른 선행사 분석의 방법이 유효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음성형으로는 실현되지 않지만 기능상으로는 문법 범주로서의 통사·의미적 실효성을 유지하고 있는 범주를 영논항으로 통칭할 수 있다. 그러나 영논항의 이 개념은 생략이나 삭제의 경우는 물론 화용적인 이유로 성분이 생략된 경우까지를 모두 포괄하게 된다.
(1) 가. 철수가 영희에게 [[e] [e]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 철수가 선생님께 [[e]건강하시라]고 말했다.
다. [며칠 전에 새로 [e] 산]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라. [e] 얌전히들 놀고 있어, [e] 싸우지들 말고.
(1가~다)의 예들은 모두 논항 위치에 영논항을 갖고 있으며, 영논항 위치에 실질 명사나 대명사를 복원시키는 일이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1다)와 같은 보문 구성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영논항은 (1가~다)의 예에서와 같은 영논항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한 경우로 한정된다. 그러나 (1라)는 영논항이 논항 위치에 나타나 있지만, 그 존재가 담화상황에서 충분히 확인될 수 있고, 그 통사적 복원도 자연스럽다. 이는 생략의 결과로 나타난 영논항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넓은 범위의 영논항 표현의 범위에 속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영논항의 유형을 좀더 세밀히 살피고 다듬을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제기하려는 두 번째 문제는 통제 내지 결속과 관련된다. 통제와 결속은 지시대상과 변항성 범주 사이에 맺어지는 조응현상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유사한 통사원리이다.
(2) 가. 철수i는 자기i가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있다.
나. 철수i는 [e]i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있다.
(3) 가. 새i들은 제i 이름을 부르며 운다.
나. 사람i은 죽어 [e]i 이름을 남긴다.
(2가, 3가)는 재귀칭대명사 ‘자기’와 ‘제’가 쓰인 데 비해 (2나, 3나)는 같은 구조의 문에 영논항이 실현된 문장이다. (2가, 3가)의 ‘자기’와 ‘제’는 ‘철수’, ‘새’와 각각 결속되어 서로 지시적 동일성을 유지하게 된다. (2나, 3나)의 영논항의 성격을 대명사로 가정한다면 이 역시 ‘철수’, ‘사람’을 선행사로 삼아 지시적 명료성을 확보할 수 있다. 대명사와 영논항이 같은 방법에 의해 그 지시성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전자에 대해서는 결속이론을 후자에 대해서는 ‘통제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별은 Chomsky(1981) 이래 대명사 위치의 영논항을 PRO나 pro로 규정하고, PRO는 지배되지 않는 위치에만 나타날 수 있다는 정리를 전제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라고 본다.
2. 영논항의 유형과 실재
2.1. 논항구조와 영논항 인식
영논항은 그 명칭에서 ‘부재’(不在)와 ‘논항’의 두 개념이 포착된다. 영논항은 논항 위치의 부재 성분으로서 서술어의 논항구조와 대조를 통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서술어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구성하게 되는 문의 형식과 의미 내용의 정보 등으로 구성되는 논항구조(argument structure)와 자질 명세(feature specification)를 갖는다. 그 결과 서술어를 보면 그것이 구성하게 되는 문장의 얼개가 비교적 명료하게 그려진다. 이 논항 명세와 세부 조건을 충족하는 성분들이 어순에 맞게 통합된 구성은 문법적인 문장 구성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비문이 된다.
(4) 가. 진주는 학생이다.
나. 진주는 한용운의 시를 읽는다.
다. *방해했구나, 계속 해라.
라. *어서 열어!(잠겨 있는 방문 앞에서)
(4가,나)의 문장은 그 서술어인 ‘-이다’와 ‘읽는다’가 명시하는 어휘내항의 하위범주화 정보를 충족시키고 있지만 (4다,라)는 어휘내항의 하위범주화 정보와 실제 문장 구성이 일치하지 않고 문구성소 일부가 결여된 상태다((5)참조).
(5) 어휘내항의 하위범주화 정보
가. ‘학생이다’ : [COMPS NP[nom]]
나. ‘읽는다’ : [COMPS NP[acc], NP[nom]]
다. ‘방해하다’ : [COMPS NP[acc], NP[nom]]‘계속하다’ : [COMPS NP[acc], NP[nom]]
라. ‘열다’ : [COMPS NP[acc], NP[nom]]
(5)와 같은 어휘내항에 명시된 성분을 논항(argument)이라 하는데 수의논항이 아닌 필수논항은 반드시 구체적인 어휘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진주는 읽는다.’는 식의 비문이 도출될 수 있다. 필자는 모든 문장은 반드시 핵어(head) 곧 서술어가 갖는 논항이 완전하게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는 Sag & Wasow(1999)의 논항 실현의 원리(argument realization principle)와 항가 원리(valence principle)가 한국어의 통사현상을 분석하고 기술하는 데도 유효할 것으로 판단한다.
(6) 논항 실현의 원리논항구조가 명세하는 어휘범주가 ?????라고 가정하면, ??는 명시어(specifier) 자질인 SPR에, ??는 보충어(complement) 자질인 COMPS의 자질값에 각각 해당한다.
(7) 항가 원리규칙이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한, 모범주(mother)와 핵자범주(head daughter)의 SPR과 COMPS 자질값은 동일하다.
논항구조 상의 논항은 반드시 어휘범주인 명시어와 보충어로 실현되어야 하고(논항 실현의 원리), 핵자질(head feature)을 구성하는 논항정보는 하위에서부터 모범주로 투사된다(항가 원리)는 원리이다. 이와 함께 주어가 논항구조 속의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분명한 언급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5)의 하위범주화 정보에 나타난 바(‘NP[nom]’)와 같이 주어의 논항성을 인정하기로 한다.
(8) 주어 논항의 원리문장의 모든 서술어는 항가 자질의 기본값으로 주어 논항을 갖는다.
이 원리들에 따르면 (4가,나)는 정문으로, (4다,라)는 비문으로 판정된다. 그러나 이론상의 결과와는 다르게 (4다,라)는 한국어 화자들의 국어생활에서 자주 그리고 정상적으로 사용되고 받아들여지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논항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2. 통사적 실체로서의 영논항
영논항의 실현을 논의할 때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는 영논항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심리적 근거를 한국어 화자가 갖고 있느냐는 점이다. 곧 영논항 인식을 추상적 수준이 아닌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문법이론으로 구성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9) 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잘들 놀고 있어. 싸우지들 말구.
(9)에서는 (가,나) 모두 주어가 어휘범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9가)의 예에서는 ‘주어-서술어’의 일치현상(agreement)이 관찰된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