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찍고 뮤직비디오도 찍는 촬영감독. 하지만 늘 다 때려치우고 여행 떠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줄곧 여행과 밥벌이 사이를 오가며 1,0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았다. 외교통상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된 예멘과 시리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가 그의 집이고 고향이었다. 사진 찍고 글 쓸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왕의 남자] [우아한 세계] [사랑비]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촬영팀으로 일했다. 2010년 내셔널지오그래픽 코리아 사진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2012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은 [반달곰]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해운대 소녀]를 촬영했다. 『빅이슈』에 사진과 글을 연재하며 재능기부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렇게 멀 줄이야. 릭샤로 30분 넘게 달려왔다. 약속한 금액에서 얼마를 더 보태 삯을 치렀다. 운전수는 나를 내려주고 노점에서 담배 한 개비를 사 피웠다. 녹초가 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지친 육신을 추스르고 숨을 고르더니 케이크 한 조각을 사 먹었다. 지쳐서 떨리는 손으로 케이크를 감싼 종이를 간신히 벗기고 허겁지겁 입에다 밀어 넣었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간절한 케이크도 있다. 내가 먹는 케이크와 그가 먹는 케이크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가 부끄럽다. ---「 #2 간절한 케이크」 중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소란이 일었다. 몸을 돌릴 공간조차 없어 곁눈질로 보니 사정은 이랬다. 각각 자리 하나씩을 차지한 아저씨와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그의 아들을 향해 어떤 아줌마가 자리를 하나 내놓으라고 실랑이 중이었다.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이 마당에 반 토막만 한 녀석이 자리를 하나 차지한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저씨도 나름 대단한 방어 논리가 있는지 설전이 막상막하였다. 터질 듯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버스는 부풀고 있었다. 승객이 싸우거나 말거나 버스는 출발했고 소란은 잦아들었다. 그런데 버스가 몇 분 달리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뭐지? 상황을 파악한 나는 실소가 터졌다. 길에는 이 버스에 타려는 사람들이 다시 또 한가득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로 한가득. 이미 세계신기록을 달성한 것 같은데, 딱 그만큼의 사람들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를 탈출하는 마지막 버스에 오르려는 난민처럼 사람들은 필사적이었다. 창문을 넘어 버스에 타고 지붕 위에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설전을 벌였던 아저씨의 큰아들도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아하, 그러니까 저 자리는 두 아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한 자리에 아이 둘이 앉으면 아줌마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줌마에게도 치명적인 원군이 당도했다. 창문을 통해 넘겨지는 갓난아기를 아줌마가 받는 중이었다. 거의 전운에 필적하는 긴장감이 돌았다. 아줌마는 아기를 안고 엄청난 고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부자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나까지 흠칫할 정도였으니, 진정한 사자후였다. 큰아들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켰고 작은아들은 아빠의 무릎으로 옮겨 앉았다. 홍해가 갈라지듯 열린 자리에 아줌마가 앉고 대뜸 앞섶을 풀어 젖히더니 아기에게 젖을 물려 버렸다. 나는 손뼉을 칠 뻔했다. 아줌마, 완벽하게 이기셨어요.
박 로드리고 세희의 여행은 낯설다. 그는 풍문과 상식으로 여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은 세상에 가득한 편견과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해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꼼꼼히 쳐다보고,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며,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그만의 방식으로. 이미 가본 곳이라고, 이미 아는 곳이라고 과신하지 마라. 이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당신이 이미 여행한 곳이 그 은밀한 속내를 전혀 보여 주지 않았음을 깨달을지 모른다. -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박 로드리고 세희의 사진은 몇 년 전 전시회에서 본 적이 있는데, 사진들의 시선은 주로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을 담는 사진가의 본질은 사랑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다. 그의 글에도 역시 사람 이야기가 많았다. 꾸밈이 많은 세상에서 유독 꾸며내지 않은 진정성 있는 글과 사진들이 이 책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그가 걸었던 길과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함께 만나고 돌아온 듯했다. 누구나 여행을 떠나지만 누구나 가슴으로 만나지는 못한다. 그건 아마도 마음을 닫은 채 여행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만난 사람과 풍광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성과 외로움이 동시에 떠오른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신미식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