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인생론에 관한 책이 많습니다. 윤리학(또는 철학)을 인생론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윤리학과 인생론은 확실히 말해서 정반대입니다. 윤리학은 일반적인 해답을 줍니다. 하지만 본문에 썼듯이 그 해답은 추상적이라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경우에 맞춰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인생론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비즈니스 서적 중에도 인생론을 다루고 있는 책이 많습니다. ‘잘나가는 비즈니스맨은 이것이 다르다!’라든가 ‘일류가 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은 대체로 인생론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윤리학과 인생론, 어느 쪽이 좋을까요? 인생론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니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 편하니까요. 이에 비해 윤리학은 어느 정도 답은 주지만 나머지는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론이 더 편리한 걸까요? 물론 인생론을 다루는 책이나 비즈니스 서적 중에는 좋은 책도 많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많습니다. 보통은 구체적인 경우를 다루고 있기에 사람에 따라 맞는 것이 있고 안 맞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책을 한 권 읽고 나서 내 상황과 맞지 않으면 다른 책을 찾아보시나요? 책마다 하는 얘기가 정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내 상황에 맞는 책을 찾다가 평생을 허비할지도 모릅니다. 한편 윤리학은 스스로 응용을 생각해야 하는 약점은 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 굉장히 편리합니다. 심지어 그걸 실제로 응용하는 것이 ‘나’라는 것은 사실 약점이 아니라 우릴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큰 이점이라고 봐야 합니다.
--- 「2장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실제로 생각해보면 대부분 도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거나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등,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것들을 주입식으로 배웁니다. 물론 막연하게 타인이라고는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인간관계’에 주목해보겠습니다.
문제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은 타인과의 관계를 떼어내고 생각하면 모두가 각각 개인입니다. 개인의 개(個)는 낱으로 된 물건을 뜻하기 때문에 개인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표현일지 몰라도 타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도 관계의 방식 중 하나입니다. 그런 개인이 모인 것이 사회입니다. 하지만 사회도 딱히 인간관계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사회는 굉장히 멀고 얄팍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서로 타인인 사람들끼리’ 모인 관계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알기 쉬우므로 기존의 윤리학도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생각해왔습니다(부록에 썼지만, 윤리학자 중에서도 벤담은 사회 중심이었던 반면, 칸트는 개인을 기반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 생활을 아우르기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존의 윤리학자들도 인간관계에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 우리 한 명 한 명은 개인입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회에서 개인은 기본적으로 서로 타인이기 때문에 관계로서는 ‘얄팍한 관계’입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칸트와 벤담이 배제했던 가족과 친구와 같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친밀한 관계에도 간결한 이름이 있으면 좋겠지만 찾기가 어렵습니다. 친밀권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별로 쓰지 않습니다. 적당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친밀한 관계’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는 개인, 사회, 친밀한 관계 이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 「3장 ‘삶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 중에서
4장에서는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줌으로써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은 정의를 생각할 때 『데스노트』를 참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의에는 그밖에도 몇 가지 패턴이 더 있습니다. 오랜 옛날에도 이를 논의한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벌을 주는 패턴의 경우, 특정 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벌을 주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이 패턴을 ‘조정의 정의’라고 부릅니다. 이에 관한 약속이 법률이고,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법원이었습니다. (...)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려 균형을 맞추는 것은 이른바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더해서 서로 상쇄해버리는 패턴입니다. 이에 대해 플러스에 플러스를 더해서 균형을 맞추는 패턴도 있습니다. A가 B에게 무언가를 주고, B는 그 답례로 A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교환입니다. 이 경우도 정의라고 한다면 A가 준 것과 B가 준 것이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이른바 등가교환이라는 것입니다. 교환한 것의 가치가 같다면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교환의 정의’입니다. 하지만 죄와 벌의 경우엔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워 재판이라는 사회의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환의 경우에도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모두에게 공통되는 척도로 ‘돈’이라는 사회의 제도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건 단순 교환이라기보다 매매가 됩니다. 정의는 법률뿐 아니라 경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
조정의 정의와 교환의 정의는 서로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는 사회 속에서의 양자 관계였습니다. 조정의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교환의 경우에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양자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니 그곳에 사회가 관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분배의 정의’라 불리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대략 말하자면, 이것은 무언가를 다 같이 나누는 것인데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사회 전체와 각 개인의 관계입니다. 게다가 양자 관계는 상호적이었지만 분배의 경우 흐름은 기본적으로 일방통행입니다.
대표적으로는 국가의 예산 배분이 있고, 좀 더 알기 쉬운 것은 세금입니다. 세금은 우리가 납부하는 것이지 분배해서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금은 사회 전체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가 분담하는 제도입니다. 이른바 마이너스 분배일 뿐이지 분배임은 틀림없습니다. 조정의 정의가 법, 교환의 정의가 경제와 관련이 있다면, 분배의 정의를 담당하는 것은 정치입니다. 이렇게 정의의 세 가지 패턴은 사회의 중요한 세 가지 시스템과 각각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6장 ‘사법, 경제, 정치를 보는 눈’」 중에서
정리하자면 자유라는 것은 나에게는 권리가, 남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모두 해당하니 남에게는 권리가,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나의 권리는 타인의 의무와 세트입니다. 의무를 지키면 나의 자유는 제한되지만, 그것은 나의 권리를 즉,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최소한의 자유이므로 이런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고 부릅니다. 특히 사회적 권력은 때에 따라서는 우리 개인을 압박할 때가 있으므로 개인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유명한 『자유론』의 기본 주장입니다. 이것이 소극적 자유의 원천입니다. 소극적 자유를 생각했으니 그럼 이제 적극적 자유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이것이 다음 과제입니다. (...) 관계에서 분리되는 것, 벗어나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적극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가가는 것, 즉 ‘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에게로 향하는 자유’라면 조금 전 최소한 필요하다고 했던 ‘타인과 분리된다’라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향해야 할 곳이 타인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럼 적극적 자유는 나에게로 향하는 자유일까요? 그럼 그 실상은 뭘까요? 나에게로 향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에서’가 출발지를 나타낸다고 한다면 ‘~에게로’는 목적지를 나타내겠죠. ‘나 자신’이 목적지? 그렇습니다. 적극적 자유라는 것은 나 자신을 목표로 하는 자유입니다. (...)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식으로 살지는 우리의 자유라서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저 그때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살 것이다’라는 삶의 방식의 원칙을 스스로 만드는 것, 이것이 자율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자유란 무법이 아니라 나만의 규칙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율, 적극적 자유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자율이 가능해진 사람을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연령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 대에 이미 자율이 가능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쉰 살이 되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율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여러 가지 망설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적극적 자유인 자율이란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율’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을 제어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일종의 제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일까요.
--- 「8장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중에서
조금 전 생각을 응용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정이 무언가 공통점이 있어서 그걸로 이어지는 관계라면, 이와는 반대로 연애는 서로에게 이질적이어서 이어지는 관계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질적이기만 해서는 아무런 관계도 생겨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히 이질적이라기보다 서로가 달라서 나한테 없는 것을 상대에게 발견하고 그것을 서로 원하는 관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연애라는 것은 이런 패턴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같은 것, 공통된 것’에 기반하고 있는 패턴은 공동성으로 부릅니다. ‘달라서 끌리는’ 패턴은 다른 것으로 서로 보완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이런 것은 상보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우정을 포함하는 ‘공동적 사랑’과 연애를 포함하는 ‘상보적 사랑’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을 ‘같다는 것’에 기반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공동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외의 사랑, 즉 상보적인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 「12장 ‘연애 그리고 우정’」 중에서
학생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사랑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건 알았어요. 하지만 사랑 중에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도 있지 않나요? 이 사랑은 상보형인가요, 공동형인가요?’ (...) 연애와 우정이 상호적이고 서로에게 기본적으로 대등한 것에 비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전혀 대등하지 않습니다. 일방적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관계는 대등하지 않고 비대칭적입니다. 사제 간의 사랑도 이쪽일지 모릅니다. (...) 회사도 친밀한 관계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와닿지 않습니다. 규모가 큰 회사라면 더 사회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쉽게 말하자면, 회사는 사회 그 자체는 아닙니다. 회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설립된 것인 데 비해, 사회에는 공통의 목표나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모르는 사람들, 여러 생각과 목적을 가진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입니다. 물론 사회 전체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가 노력을 해야 하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사회는 누군가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한편 회사는 사회 속에 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그 공통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회사는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친밀한 관계와도 다릅니다. 가족 및 연인의 기반은 좀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연인은 단순히 만들자고 생각하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회사 개념의 연인도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회사는 만들자고 생각해서 만든 곳입니다. 따라서 회사는 친밀한 관계이지만 사회와는 전혀 다르고, 친밀한 관계 중에서도 꽤나 특이합니다.
--- 「13장 ‘가족부터 회사까지’」 중에서
국가는 아동학대방지법이라는 법률을 통해서, 그리고 지방마다 아동상담소라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아동학대를 예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학대 신고를 받은 상담소 직원이 그 집을 방문하면, 부모가 “학대하지 않았어요, 훈육한 거예요”라고 말하며 아이를 보여주지 않거나 집에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결국 학대당한 아이가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동상담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이에게 뜨거운 물을 붓거나 멍이 들 정도로 때리는 건 상해죄입니다. 그러니 유명무실한 아동상담소를 운영하기보다는, 범죄자로 간주하고 경찰이 바로 체포하면 되지 않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럼 왜 국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가 국가나 지방이라는 사회와, 부모와 자녀 관계라는 친밀한 관계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 자녀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사회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원칙, 이른바 민사불개입의 원칙을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가정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 가정 내 문제는 살인사건과 같은 범죄가 벌어지고 난 후에야 경찰이나설 수 있게 됩니다. 즉, 사회는 살인과 같은 비극이 있기 전에는 함부로 가정 문제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아동학대 또는 가정 폭력과 같은 문제에서 언제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지를 정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특히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자율성이 있는 부모와 아직 자율성이 없는 아이와의 대등하지 않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린 자녀에게 독자적인 권리를 인정한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녀의 권리가 중시되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어른과 똑같은 권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부모 자녀의 관계가 사회적인 관계, 즉 대등한 사람들의 관계와 전혀 다른 것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학대 문제는 부모와 자녀라는 종적 상보형과 사회와의 관계의 문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상사의 부당한 명령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회사 내 종적 공동형과 사회와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따를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일단 자기 자신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사의 명령에 따르면 그 햄을 구입하는 일반 소비자들을 속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로 인해 사회 전체에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명령에는 따라서는 안 됩니다.
부당한 행동을 하거나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사의 명령을 따를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사회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라는 친밀한 관계(이 경우는 종적 공동성)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상사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금껏 다룬 내용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답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을 친밀한 관계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틀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14장 ‘세 가지 기둥의 균형 맞추기’」 중에서
제가 강의하면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시험 채점입니다. 강의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시험 채점은 책임도 무겁고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도 학교라는 제도의 일부이고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은 각각의 개인이지만, 채점하는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에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친밀한 관계’는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럼 채점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시험에서 성적을 매기는 것은 ‘사회 제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정의’가 중요합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단계입니다. 먼저 세 개 중에서 어느 영역인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정의에는 세 가지 패턴이 있었습니다. 그럼 채점은 어느 패턴일까요?
이 경우 죄에 맞는 처벌을 주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주고받는 교환도 아닙니다. 채점자는 사회를 대표하고 수많은 학생에게 점수를 줍니다. 이것은 분배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선생님, 머리 벗겨지셨네요”라고 비난한 학생이 괘씸하다고 점수를 깎는 벌을 주면 안 됩니다. 채점에서 조정의 정의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물며 “선생님, 이번 시험은 자신이 없으니까 20점만 더 주세요. 1점당 1만 엔 드릴게요”라는 학생의 말에 점수를 줘서도 안 됩니다. “너무 싼데 더 뭐 없을까?”라며 교섭해도 안 됩니다. 가치가 동등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이건 교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배의 경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모든 학생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분배를 할 것인가, 각각 차등 분배할 것인가. 시험 채점의 경우에는 일률적인 분배는 안 됩니다. 공부한 사람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같은 점수를 받는다면, 공부한 사람에게는 억울한 일이 되고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뜻밖의 이득이 되어버립니다. 이건 부당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한 학생에겐 좋은 점수를 주고 그다지 공부를 안 한 학생에게는 그에 맞는 점수를 줘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당연한 것을 사회에서 유지하는 것이 정의였으니까요.
일일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 정도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이미 윤리의 기본이 몸에 밴 상태라서 평소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평소에는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던 당연한 일이 사실은 지금처럼 단계적인 판단, 일종의 절차를 거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윤리의 기본 원리는 평소 굉장히 당연하게 행동하고 느끼는 것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이제 다른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 「15장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나침반으로’」 중에서
이 장면은 〈대부〉의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평소에는 무서운 돈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친구(횡적 공동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저는 조직폭력배나 마피아는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나(조금은?) 있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라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윤리의 기본 원리가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가족 및 동료에 한정된 것이고 밖에서 보면 단순한 범죄 집단이며 정의에 위반하지만 말입니다.
사회의 정의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다’를 기반으로 합니다만, 그만큼 사람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습니다. 그래서 정의는 때로 차갑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에 구조를 요청합니다. 사회에서는 누구나 같은 인간으로 간주됩니다. 모두 평등하다는 개념인데, 반대로 말하면 사람은 모두 똑같아서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안에서 내가 있을 곳을 찾는 것이 힘듭니다. 하물며 잘못된 일을 하면 더욱더 있을 곳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조직폭력배나 마피아같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있을 곳을 주고 지켜주는 가족 같은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딱히 조직폭력배나 마피아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족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습니다. 크기의 차이는 있어도 내가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그 집단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회와 부딪히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갈등과 딜레마는 사회적인 것과 친밀한 관계, 정의와 사랑 사이에 가장 자주 나타납니다. 〈대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 「16장 ‘상황을 해독하는 힘 기르기’」 중에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소셜(social)은 사회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SNS는 반드시 사회적이진 않습니다. 아니 그보다 친구 관계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친밀한 관계, 특히 횡적 공동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영어의 소셜에는 사회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교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소셜 댄스는 사교 댄스로 번역되는 것처럼요. SNS의 친구는 인터넷상에서만 친구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계정 친구를 통해서 친구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통해 또 다른 친구와 알게 되는 것은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서도 있는 일이지만, SNS에서는 그것을 굉장히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당연하게도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나거나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재회할 수도 있으니 이건 좋은 측면입니다. 하지만 SNS의 친구는 널리 퍼지기 쉬운 만큼 관계는 매우 얄팍합니다. 실제로 LINE 등 SNS로 인해 청소년이 성적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렇게 SNS라는 것은 친밀한 관계와 사회의 중간적인 위치라 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반은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그 확대 방식이 현실 세계에서의 친밀한 관계보다도 쉽고 빨라 그만큼 얄팍한 관계가 된다는 의미에서는 사회적인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 및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관계에 크게 변화가 생기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 「17장 ‘시대적이고 도발적인 문제들까지’」 중에서
우리는 횡적 상보성의 모델로서 주로 연인이나 부부를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례입니다. 횡적 상보성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생각해볼 만한 것은 의료입니다. 의료 면허는 국가자격증이고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사회적입니다. 특히 경제학적으로 보면 서비스업과 손님의 관계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파트너를 돌보고 돈을 받지 않지만,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 직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의료는 분명하게 사회적 제도의 일부입니다. 그렇다고 의사가 단순 서비스업은 아닙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서비스업이지만 그것이 의료의 본질은 아닙니다. 서비스업이라면 손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손님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의료에서는 이런 관계가 기본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률에도 병원은 보통 회사와 달리 의료법인이라는 특별한 조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반 회사는 영리법인이고 이익 추구가 목적이지만, 의료법인은 비영리법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의사에게 가는 이유는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몸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가 걸린 병이 어떤 병인지도 모르고, 다쳐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전문가인 의사 선생님에게 진단과 치료를 받습니다. 즉,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단순히 동등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 관계입니다. 우리의 분류로 말하면 종적 상보형 관계에 가깝습니다. 예로부터 ‘의는 인술’이라는 말이 있는데 참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는 곧 환자는 약한 상태니 의사는 환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의사는 환자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배려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른바 퍼터널리즘(paternalism) 즉, 온정주의가 되기도 합니다(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아버지[pater]이고, 부권주의라고 번역됩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는 부모와 자녀가 아닙니다. 온정주의가 지나치면 환자는 의사를 너무 의지하게 되고 반대로 의사는 지나친 권위와 힘을 갖게 됩니다. 실제로 의사가 멋대로 치료 방침을 결정해버리는 경우도 많았고(물론 의사로서는 환자를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지만), 환자는 원치 않은 치료를 받고는 했습니다. 의료는 환자를 위한 것인데 이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자의 권리가 침해받는 셈입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사전 동의(인폼드 컨셉트[informed consent])라는 개념입니다. 의사에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인폼드) 환자 본인이 치료 방침을 결정한다(콘센트)는 것입니다. 환자의 자율, 자기결정권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는 환자의 권리가 중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대등하게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과거에는 종적 상보성이었던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지금은 횡적 상보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존의 생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환자가 뭐든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의사의 설명이 없으면 환자는 자기의 병에 대해서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아도 어떤 치료법이 있는지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무리 대등하다고는 해도 서비스업에서 말하는 종업원과 손님 같은 관계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의료가 단순한 서비스업이라면 교환의 일종이므로 나머지는 확실히 돈 문제입니다. 정치인 중에서도 모든 것을 돈 문제(좁은 의미의 경제적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가 나는 병원은 없애야 한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야도 마음도 참 좁습니다.
경제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경제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는 우리의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의료의 경우는 의사 및 병원과 환자와의 관계만 생각하면 교환으로 보이지만, 의료 보험제도는 의료비의 꽤 많은 부분을 함께 부담하고 있으니 이건 분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의사와 환자인데, 이것은 약한 사람을 돌본다는 친밀한 관계에 가깝습니다. 의료 하나만 보더라도 이렇게 몇 가지 측면이 중복되어 나타납니다. 의견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는 면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면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세하게 분류했던 이유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 「19장 ‘친밀한 관계 심화 분석’」 중에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다 함께 결정하는 것이 좋은 것, 그 일례로 생식보조의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이것도 생명윤리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최근에는 난임 치료를 위해 생식보조 의료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시술이며, 성공 확률이 낮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하느라 거액이 드는 경우도 흔합니다. 인공수정은 한 번에 성공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난임 치료는 건강보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병에 걸려 병원에 가면 보험에서 일부 비용이 지원되기 때문에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적습니다. 하지만 난임 치료는 미용성형과 마찬가지로 모든 금액을 자기가 부담해야 합니다. 그런데 난임 치료에도 보험을 적용하면 어떨까요?
현재 일본은 저출산이 문제시되고 있으니 생식보조의료를 이용해서라도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러니 난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보험 대상에 넣도록 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반면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므로 사회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임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른 척하자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난임과 질병은 다릅니다. 난임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건강이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목숨이 걸려 있는 병이라면 사회가 도와야 하지만, 아이를 만드는 것은 사회에서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단, 일시적으로 난임 치료에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등의 정책을 생각할 수는 있겠죠.)
실제로 모든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난임 부부 중에서도 난임 치료를 하지 않는 부부도 있고, 난임은 아니지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부부도 있습니다. 본인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율 또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공격의 윤리에 속하죠. 반대로 생식 여부를 사회에서 정한다면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난임 수술의 강제 실시 등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 「20장 ‘모두를 위한 정의는 가능한가’」 중에서
현대에는 뭐든 확실한 것이 선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더라도 불확정 의무는 마치 그레이 존 같다며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해야 하는 것(확정 의무)이라면 법률로 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많습니다. 확정 의무를 법률로 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가 계속해서 늘어날 가능성도 있고, 그러다 결국에는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불확정 의무니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사람도 나올 수 있겠죠.
그렇게 되면 사회는 꽤 불편해질 것입니다. 조금 전 예시에 나왔던 횡단보도를 건너는 할머니를 다시 볼게요. 할머니에게 ‘남에게 짐을 맡길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끙끙거리며 들고 가는 할머니에게 “당신은 그 짐을 맡길 권리가 없고 저는 그 짐을 들어드릴 의무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무 매정하지 않나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냐며 핀잔을 주고 싶어집니다. 타인의 권리가 아니더라도, 해서 좋은 일은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서로가 꽤 편해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측면의 불만도 나옵니다. “사람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건 의무라기보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의무라는 말을 붙여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고 싶다고요.”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무라는 말을 들으면 억지로 시켜서 하는 느낌을 가집니다. 윤리학의 전설인 칸트는 엄격한 성격으로 유명합니다. 칸트는 산책 시간을 정확히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갈 때 시계를 맞췄다고 하는 일화까지 있습니다. 칸트가 주장한 것이 바로 의무론입니다. 하지만 자주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데요, 칸트가 말하는 의무는 억지로 시켜서 하는 거만한 명령이 아니라, 좋은 일이니까 한다고 하는 의욕 같은 것이었습니다.
칸트는 의무와 행위의 관계를 세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의무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무에 따른 행위’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수준의 행동을 말합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는 ‘의무에서 나오는 행위’로 이것은 단순히 의무여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칸트는 이 세 번째만 (좁은 의미에서) 도덕적이라고 말합니다. 굉장히 엄격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타인이 억지로 시키는 엄격함이 아니라 나에 대한 엄격함입니다.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도덕적인 의의가 있는 의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의무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쉽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의무가 아니라 자유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칸트는 의무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의무에서 나오는 행위만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의무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 억지로 한다는 느낌으로 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의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좋아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에서 오는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서론이 꽤 길어졌습니다만, 불확정 의무라는 것은 이름만 의무일 뿐이고, 의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긴 하지만, 충분히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무의 뉘앙스가 ‘강제로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걸 생각하면, 그 말을 배제하고 ‘자유’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찾고 있던 ‘타인에게로 향하는 자유’의 알맹이는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적인 것도 아니고 방어의 윤리도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일부러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격의 윤리에 속합니다. 자유이긴 해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변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자유를 생각한다면 사회 전체가 조금 더 좋아질 것입니다.
--- 「21장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