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필연적으로 여러 생을 사는 존재들이다. 현생 속에 전생(前生)의 나와 더 먼 생애의 내가 동시하고, 한 존재는 수많은 생애와 우주적 형상이 얽힌 운명이고, 그런 채로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회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우리는 그런 존재이지만, 그런 줄도 모르던 것을 돌연 깨닫게 하는 게 사랑이다. 우리는 누구든, 언젠가 사랑에 빠지는데, 그 순간 생은 중첩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생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을 함께 겪기 마련이니까. 그것이 이 생에서 우리가 기억 못 할 전생을 겪는 방식이다. 세계의 틈에 놓인 존재를 사려하는 목소리로 작가는 기나긴 전생(全生)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끝없이 회귀하는 유랑의 일부인 동시에 전부인 이 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누군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라고.
편혜영 (소설가)
모두가 유랑하는 자들이다. 0년대의 세계, 메시아라 불린 자의 유랑이 있고, 1000년대의 세계, 그의 흔적을 좇는 사제와 역사가의 유랑이 있으며, 2000년대의 세계, 제 목숨의 뿌리를 더듬는 한 혼혈아의 유랑이 있다. ‘환생’이라는 장치로 이 셋을 연결한 것이 이 소설 득의의 발상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근본물음이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유랑의 서사에 내장돼 있는 실천적 의의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무속신앙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 종교가 내놓은 가치 있는 지혜들을 하나의 근본물음 속으로 끌어안으면서 인류가 2천년 동안 저지른 최악의 종교 전쟁들에 통렬한 항의를 제기할 때, 이 소설의 비교종교학은 국제정치학이 된다. 이런 일을 이만한 규모와 심도로 해낼 수 있게 되기까지 이 작가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지적 유랑이 필요했을까. 삶의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이 무서운 의지 앞에서 나는 소설이 여전히 사유의 가장 뜨거운 형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안도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