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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의 관
선택의 상자 귀환의 항아리 분노의 돌 황금잔 천부의 재능 무결의 인간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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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고상한 맛이네.”
이 말은 곧, 간이 약하다는 소리다. “그렇게 아끼지 말고 소금이든 설탕이든 더 써라. 어머님이 절약을 많이 하셨나? 얼마 전에도 고상한 차림이었지?” 이 말은 곧, 우리 집과 어머니가 가난하다는 소리다. “그리고 말이야, 아무래도 이치카가 말이 너무 느린데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겠어.” 남편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 p.9 남편은 더러운 소리를 내며 된장뭇국을 후루룩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정리된 옷 서랍에 주저 없이 손을 쑥 집어넣더니 양말을 움켜쥐었다. 남편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와 이치카와는 눈 한번 맞추지 않고 나가버렸다. 내가 엉망진창이 된 서랍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어머니 기미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시냐고 묻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네 설교라고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데 말이다.” 기미코는 남편과 얘기할 때와 달리 나와 얘기할 때 목소리가 한 톤 낮다. “무시할 리가 있겠어요.” 애써 밝게 대답했으나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가 너무 떨렸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간사이 사투리가 전염된다. 간사이 사람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이 쓰는 사투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화가 난다는 길거리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하물며 기미코는 결혼하고 간토에서 산 세월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투리를 고수하는 사람이다. 예상대로 기미코의 성을 돋우고 말았다. 안 그래도 가는 눈을 더 날카롭게 뜨고 나를 노려본다. “아주 개무시를 하지.” 맞아요. 당신을 정말 멍청한 늙은이라고 생각한다고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그 정도로 강한 성격이라면 얼마나. “그렇지 않아요.” 입가를 힘껏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입가가 긴장해 부들부들 떨렸다. 기미코는 내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노인네라고 무시하지? 아, 정말 세상 무섭구나.” --- pp.10~11 “네가 이 요란을 떨어 유이치가 신고했다.” 기미코가 앞장서서 다정한 경찰관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술술 늘어놓았다. 다마스크 장미 향이 코를 찌른다. “정말 남부끄러워서. 아가씨도 앞으로 아이를 키울 텐데 이러지는 말아요.” 젊은 여성 경찰관은 안타까울 정도로 당황했다. 젊은 여성에게 해서는 안 될 명백한 문제 발언이나 상대는 일반인이고 노인이라 강력하게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리라. 이제 기미코에게는 화도 나지 않는다. 망할 놈의 노인네로 계속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 그만이다. 그보다, 남편이 문제다. 경찰에 신고한 자체를 믿을 수 없다. 내게 말을 걸어볼 마음은 없었나. 경찰과 함께 나를 달랬다면 그나마 낫다. 남편은 아무 말도 없다. 흙탕물처럼 흐린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다. 니코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다. 니코를 만나고 싶다 --- p.31 “미사키 씨. 밤에 이런 차림으로 나오면 위험해요.” 니코가 서 있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도대체 니코가 왜 여기 있지? 칠흑 같은 정장을 입고 머리는 깨끗하게 뒤로 넘기고 있다. “니코 씨, 나, 나…….” 니코는 내 뺨에 손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이렇게 차갑다니, 안쓰러워라. 실은 미사키 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니코의 목소리를 듣자, 손바닥의 따스함을 느끼자, 점차 기분이 차분해졌다. 부슬부슬 이슬비가 떨어지고 있다. 니코는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니코 뒤에 몇 명이 줄지어 있다. 모두 칠흑 같은 정장을 입고 있다. --- p.45 “안이 궁금하세요? 대단하지는 않아요. 봐도 되지만 의미는 별로 없을 겁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니코의, 나이치고 당당한 태도. 이런 밤에 여러 명을 끌고 다니고, 게다가 죄다 시커먼 정장을 입고 있다. 무엇보다, 이, 불길한……. “설명해드릴까요?” “설명요……?” 바보처럼 니코가 한 말을 따라 했다. “네. 이건 결산의 관입니다. 이걸 하룻밤, 놔두세요.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냥 집 안 아무 데나 놔두세요.” 니코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름다워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빨려 들어가고 싶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 p.47 “당신이 이상해진 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런 위로를 받자 너무 미안해서 정말 죽고 싶어졌다. 무릎을 꿇고 이혼해달라고 먼저 말했다. 이렇게 착한 사람에게 손찌검이나 하고 바람까지 의심한 자신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그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이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어. (…)” --- p.188 |
“이 이야기야말로 탈출구가 없는 지옥 그 자체다!”
신예 호러 작가가 선보이는 잔혹 세계 일곱 살이 되었는데도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고, 섬뜩한 그림을 그리는 딸 이치카의 존재가 두려운 미사키. 육아 스트레스 때문인지 무뎌진 남편과의 관계 때문인지, 아니면 생계를 위해 틈틈이 아르바이트까지 해내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어서인지 그녀는 항상 지쳐있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형편에 맞지 않는 사치와 끝없는 불평으로 그녀의 마음을 좀먹는 데 일조하고 있다. 미사키가 지칠 때마다 들르는 카페에 어느 날 신비로운 분위기의 미려한 남성이 나타나 그녀를 위로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미사키는 이제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때마침 그가 비밀스러운 물건이 담긴 캐리어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만 방 안에 놔두세요”라는 남자의 당부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 다음 날이 되어 딸의 재촉에 눈을 뜨자 시어머니가 그 물건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 잠든 듯 죽어버린 시어머니와 그간 말 없는 장남 역할을 충실히 하던 남편은 생판 딴사람이 되어 그 어느 때보다 명랑하게 일사천리로 시어머니의 장례를 마무리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가 나에게 이런 선물을 준다면, 나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그래도 만나고 싶다. 두렵지만, 만나고 싶다. 받아보고 싶다. 선택해보고 싶다. 욕망이 꿈틀댄다.” _ 옮긴이의 말 중에서 기묘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곱 편의 소설마다 완전히 무너져있는 주인공 앞에 그 미상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은 구네 니코라이. 러시아 혼혈인 듯 눈부신 그의 외모를 본 이들은 ‘눈을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니코라 불러주세요’라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이 남자. 비범한 외모 덕분인지 등장인물에게 닥친 슬픔은 니코를 보자마자 사그라들고, 점차 구네의 말을 맹종하게 된다. 구네의 말을 따르다 보면 과거에는 가장 사랑했더라도 지금은 죽이고 싶은 상대가 일순 사라질 수 있고, 사고로 죽은 아이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단, 구네의 지시를 잘 따를 때만. 내가 읽고 있는 게 과연 무엇인가 혼란해하는 틈에도 독자들은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주목할 점은 이 책에 공포심을 자극하는 직접적인 소재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구네의 선물은 종국에는 파국이다. 그러나 그 파국의 과정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탐미적이기까지 하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힘든데 이런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스스로를 잘 붙잡으시라. 아찔하게 섬뜩하고 구토가 몰려올 것만 같은 이야기가 당신을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