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발전은 자본주의의 실패를 극복하고 대전환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이다. 지속가능발전은 지구의 생태적 한계에 부딪혀 파국을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류가 합의해 낸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지속가능발전은 흔히 오해하듯 개발과 보전의 대립 사이에서 중간쯤 위치한 타협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라는 유일하고 유한한 공간에서 미래세대가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지키면서 현재가 삶의 길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기존과는 다른 사고와 이행 방법을 요구한다.
--- p.20~21
물관리 정책은 인간 위주의 정책에서 인간과 모든 생명이 물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개발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과 환경보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통합물관리,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물관리 정책을 합의해 왔다. 이런 큰 흐름을 거스른 것은 이명박 정부였으며,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모조리 부정하는 가운데 다시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정책으로 퇴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명백히 실패한 정책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다시 옹호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국토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하던 시기 환경부는 4대강 사업의 환경영향을 제대로 검토하고 저지하지 못해 국토부 2중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제 사업 주체였던 수자원공사가 환경부로 통합된 상태에서 보를 존치하고 더 많은 댐을 짓는다면 환경부는 더는 환경부가 아니다. 환경을 회복하고 보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처가 환경부라면 스스로 환경을 파괴하는 부처를 환경부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 p.47-48
물관리가 통합된 현재는 환경부를 중심으로 물관리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로 물 부족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공감대도 커지고 있다. 가뭄이든 홍수든 기후재해는 물부족을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물을 귀하게 다루지 않으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관리 정책은 물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물을 ‘제약 없이 마구 쓸 수 있는 흔한 것’으로 보는 “물쓰듯 한다”는 말은 미래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물관리 정책의 전환은 물을 아끼고 되돌려 쓰는, 물 수요를 줄이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상수도와 광역상수도가 환경부로 통합되어 있는 만큼, 상수도 사업의 통합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변화도 과제로 삼을만 하다. 앞에서 살펴본 지방상수도와 광역상수도의 분리로 인한 문제점들을 되짚어 보고, 지방상수도 체계의 장점을 살려 상수도 정책의 근간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 p.78
“담배 가게에서 금연운동하는 격이라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을 찌르는 비유는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가진 첫 번째 대통령 주제 회의가 에너지 정책 회의였다. 지속위가 갈등 과제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에너지 정책은 참여정부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 당시에 오랫동안 원전에 반대해 왔던 시민단체들은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반면, 산업부는 원전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입장이었다. 전력 수급계획에 이미 반영된 6기의 원전에 더해 2기의 원전을 추가로 반영하겠다는 산자부 입장에 시민사회는 에너지 수요관리를 실효성 있게 추진하고 추가로 필요한 수요 증가는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수요관리를 한전이 맡고 있어서 말이 수요관리지 실제로는 오히려 수요를 만들어내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시민단체의 지적에 대통령이 명쾌하게 정리하신 말씀이 ‘담배 가게의 금연운동’이었다.
--- p.111-112
원전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기술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원전은 재생에너지를 따라갈 수 없다. 원전이 도입된 1970년대 이후 원전의 기술은 늘 같은 형태를 띄어왔다. 냉각수를 구하기 쉬운 해안가에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서 대규모 시설을 짓고 장거리를 고압 전선을 통해 송전하는 방식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이 그동안 많은 문제를 파생시켰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에서 보듯이 그 과정은 갈등을 일으키고, 공권력을 동원해 갈등을 눌러가면서 진행됐다. 그 결과는 늘 약자의 패배였다.
--- p.128
양양 케이블카의 착공은 제2의 4대강 사업이 될 것이다. 국토의 가장 우선적인 보호 대상을 개발 사업 대상으로 만들어 국립공원 제도 자체를 흔들게 될 것이다. 국립공원에 시설을 설치하는 일, 나아가서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해제하는 것은 국립공원으로 보호되는 자연을 보전하고 자연의 질서를 유지회복하기 위한 것이어야지 개발을 추진하는 일부의 탐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연이 보전되지 않으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연의 한계 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속가능발전의 출발이다.
--- p.213
제주도의 현재 문제가 기존의 성장 정책의 결과라는 점에서 지속가능발전은 지금 제주에서 가장 필요한 담론이고 대안이다. 지속가능발전은 자연생태계를 훼손하면서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기본 인식에서 출발했다. 제주도가 지속불가능성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자연생태를 확실하게 보전하면서, 환경 오염을 관리하고 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다시 말하자면 ‘황금알’에 해당하는 제주도의 수용능력 범위 내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의 한계에 부딪힌 사회가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이처럼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환경생태의 보전이 우선이라는,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239
노원구 소각장을 놓고 벌인 서울시와 환경부 그리고 주민들의 싸움에서 서울시와 환경부는 완전히 졌다. 당시 주민들의 폐기물 정책에 대한 주장은 서울시의 주장에 비해 훨씬 타당하고, 근본적이고, 지속가능발전의 가치에 부합한다. 시민들이 폐기물 문제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토론하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내고 다함께 실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노력들은 실제로 우리나라의 폐기물 관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제도화로 이끌었다. 재활용을 촉진한 것도 그렇고 음식물쓰레기 분리도 그렇다. 당시에 주민들이 요구했던 대로, 1~2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재활용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소규모 소각장을 짓는 것을 폐기물 처리 모델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면, 훨씬 근본적이 해결책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 p.252-253
일본의 정치적 무책임이나 무능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나라가 그 무책임과 무능을 지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안전을 방기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해양투기에 찬성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우선적인 관심이 국민들의 안전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후쿠시만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값싼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포함된 일본의 원자력시민위원회가 2019년 제시한 두 가지 방향, 방사성물질의 독성이 줄어들 때까지 초대형 탱크를 지어 보관하거나 건축재료인 모르타르처럼 굳히는 방안이 각각 3000억 원, 1조 원이 들기 때문에 340억 원이 소요되는 가장 비용이 적은 해양투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저개발국이 아니라 다소 빛이 바랬다고는 하지만 여전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에 속하는 일본의 행동으로는 보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 정부가 일본의 해양오염수 투기를 찬성하는 것은 도쿄전력의 이익을 위해 우리 국민들의 안전을 희생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 p.282
2024년 다보스 포럼에서 마이클 샌델이 경제정책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새롭게 다가온다. 오랫동안 기존 경제정책의 틈새에 지속가능발전이 들어갈 자리를 고민해왔던 내게는 나만,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위로와 동시에 다보스 포럼이 경제학과 경제학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신자유주의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안을 제시하면 그것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아서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지속가능발전이라는 대안이 제시된 지 벌써 37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담론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실패가 입증된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문맹도 아닌 경제학자들이 정말로 완전한 실패를 읽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양한 경제 사조들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는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경제이론이라는 것은 그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부를 지키고 늘이는 데 필요한 수단, 나쁜 짓을 하기 위한 자격증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 p.357
토건국가 구조가 성장우선주의와 결합한 국가 정책 지형은 위기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깨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낼 기회를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토목사업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속가능발전을 성장의 걸림돌로 본다. 성장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내를 다양한 불만과 비난으로 표출한다. 지속가능발전은 어렵고 모호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고 지나간 유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속가능발전이 쉽다면 이미 전환이 일어났을 것이다. 모호하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기 십상이고, 우리가 당면한 위기 자체가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명쾌한 해결책은 오히려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 지속가능발전이 지나간 유행이라는 사람들이 기대고 있는 경제 논리가 250년 전 아담 스미스의 이론이거나 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데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지속가능발전이 선언된 지 37년이 지났다. 이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확실히 실패한 길로 계속가야 한다는 주장은 접어야 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도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누구도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리고 시장이 지배하는 현재의 사회경제시스템이 생태환경의 보전과 사회적 형평성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키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제 낡은 서랍 속에 묵혀두었던 지속가능발전 꺼내야 한다. 그 출발 배경을 되짚어보고, 선언된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세계의 집단지성이 발전시켜온 실천방안들을 따라 잡는 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정말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 p.38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