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김습의 감정은 탄복에 가까웠다. 습관처럼 씹던 솔잎도 잊은 채로 그는 가만 향목이란 아이의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 때가 많았는데 어쩐지 참 여인으로 감탄스럽기도 하고 또 이 말 못할 감정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사실 김습은 그것이 못내 서운함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허전하면서도 어떻게 네 그럴 수 있냐는 물음을 주책없게 불러다가 던져보고 싶은 충동이 드니, 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도 그 아이를 괄시하던 소씨 부인도 요사이 영 힘이 없어 보였다.
늘 향목의 존재는 그저 휴를 잘 가르쳐준 과외선생 거기로 딱 선을 긋고서 나중에는 어디 좋은 처자 알아보려는 심산을 내내 깔고서 숨기려고도 들지 않았는데 동네에 향목이 정길이에 대해 그리했다는 소문이 돌자, 소씨 부인은 갑자기 의욕을 상실한 듯 종종 누워 있기 일쑤였다.
“왜 그러고 있수?”라고 물으면 소씨 부인은 어쩐지 멍한 얼굴이 되어 느릿느릿 일어나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입만 달싹달싹하다가는 또 가만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도로 누워버리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제 알고 있었다. 향목의 나이 비록 어렸지만 정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진짜로 다른 이에게 한눈을 팔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모두가 그 아이에게 모질게 했던 부분에 대해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동리에는 떠돌았으니.
반면 딱 한 놈이 소도 때려잡을 듯 씩씩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밥도 잘 먹고 술도 잘 먹고 동네 마실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마치 삼국지의 장비라도 된 듯 별거 아닌 일에도 동네에 있는 저어기 폭포수 하나가 떠나가라 웃어대니, 사람들은 모두가 향목과 정길의 이야기 와중에도 휴가 왜 저런다냐 했다.
“어이, 휴! 기분 좋은 일이 있는가 배? 가만 생각해보니, 휴가 인자는 대학 땜시 학원 가제? 긍게 거기 가면 여자들도 있고 뭐 그런 게 벌써 들뗘?”
강웅 총각의 말에 휴는 속없는 놈처럼 헤헤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밤에는 기정, 병희, 원주와 모여 술도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하하 웃으며 침대에 헤벌쩍 드러누워 잠이 드는데, 불이 꺼지면 그때부터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쏟는 것이었다.
“향목아, 야이, 가시내야, 나는 그냥 남자가 돼가지고 네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그때까지만 꾹 참자고 벼르고 별렀는데…… 고새를 못 참고, 딴 놈한테 정조를 맹세하면 나는 뭣이 되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왔다.
“가장 멋있는 남자가 되어 가지고 네 앞에 설 준비가 되면 그때는 최선을 다해서 내 옛날에 못해준 거, 잘해주려고 벼르고 별렀는데……, 싸 보이지 않으려고 내 딴에는 그런 거였는데……. 너 나하고 그래놓고, 어떻게 다른 놈이랑…….”
그가 결국 몸을 웅크려 울음을 토해냈다.
“흐흐흐흐흑.”
1층에 누워 잠 못 드는 김습은 실상 방음이 잘되는데다 귀도 어두워 손자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을 듣고 있었다. 하여, 나직이 읊조리는 것이었다.
“동네에 한 처자를 두고 두 총각이 가슴을 앓네. 어쩌겠는가. 내 핏줄이라도, 이제 인연 아닌 것을.”
그 말을 용케 들었는지 소씨 부인이 뒤척거리더니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사이 꿈속에서 그렇게도 예쁘고 탐스런 감을 보는데 통 쳐다만 보고 있고 입맛만 다시다 깨네요. 그냥…… 아깝고, 내가 왜 그랬을까 싶고.”
“그나저나 저놈 자식이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그러나 김습 노인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휴의 행동은 갈수록 이상해졌으니.
다음 날, 정자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여전히 향목과 정길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막을 잘 모른 채 어쩌다 둘이 엮이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동리 사람들은 이야기에 이야기를 부풀려 만들어내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 재미에 들린 상태였다.
느티나무 아래 철퍼덕 주저앉아 기정과 병희, 원주와 함께 낮부터 막걸리를 조금씩 기울이던 휴는 가만 그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살집이 두툼한 아주머니를 향해 일어나더니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 제 술 한 잔 받으시고.”
“아이고! 휴 총각이 건네면 내 만사 제쳐두고라도 받아야지.”
“그런데 아주머니!”
“어이!”
둘은 쿵짝이 잘 맞는 콤비 같았다.
“거……. 백향목이랑 최정길이랑 뽀뽀했다고 했잖여. 시방.”
“아, 그렇지. 내가 그 야그 들려줄까? 긍게 시방, 둘이 어릴 때부터 눈이 맞아가지고 설라무네 아주 찐하게 뽀뽀를 했디야.”
“아하! 그랬대요?”
그러더니만 휴가 건들건들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가 바닥에서 막걸리를 통째로 집어 들어 천천히 섞는가 싶더니 병나발을 부는데 아주머니들이 좋다고 박수를 치신다. 휴가 그것을 가만 내려놓고는 입술을 슥 닦은 뒤, 말을 하길,
“어! 그런데 어쩌죠? 나는 백향목이랑, 있잖아요.”
갑자기 그가 바지 지퍼로 손을 가져가자, 깜짝 놀란 병희가 벌떡 일어났다.
“저기 저기, 저 자식 봐. 어? 야! 뭣들 하냐?”
병희와 기정이 휴의 어깻죽지를 잡고 끌어내는데 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얌마! 놔! 옛날에 나랑 백향목이랑…… 몰라? 완전히 갈 데까지 간 거?”
아주머니들의 입이 완전히 벌어져 있었다.
“시상에나. 시상에나.”
“취해서 저러는 것여, 치마 두르면 다 좋은 것여, 뭣 땀시 저러는 것여? 대체 뭣이여?”
“글씨, 한동안은 지집이라면 다 헤벌레하는 것 같드니만.”
그도 그럴 것이 휴의 헐렁한 청바지가 벌어진 채로 팬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야! 따지고 보자고! 백향목 누구 각시야? 어?”
“얌마! 이 자식 취했어. 빨리 보내.”
“어후!”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