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동학, 120년 만에 출발점에 서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다. 100주년(1994) 때의 열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저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고, 전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아쉬움이 크다. 뭔가? 그 아쉬움의 정체는?
“여러분은 동학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우리 시대의 ‘걸어 다니는 동학’이라고 할 수 있을 박맹수 교수는 새 책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을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200~300만 명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학(東學),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최대 민중운동이자 민족운동인 120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아십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언뜻 동학에 대해서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앎이란 것은 ‘갑오년―전라도―고부―만석보―전봉준―우금치―최제우…’쯤에서 말문이 막히고 만다. 여기서 보이는 반응에 두 갈래 길이 있다. “그 정도가 전부 아냐? 그게 아니라 해도 그 고릿적 이야기를 알아서 뭐해?”라는 시니컬한 반문으로 나아가는 길이 그 하나요, “그 옛날에 끝난 일, 그것 때문에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고 결국은 식민지가 된 거 아냐?”라는 제법 논리 정연한 질책성 반문으로 가는 길이 그 둘이다. ‘농민’ 운동(전쟁) 운운하는 얘기는 또 다른 갈래이니, 여기서는 접어두자.
오늘날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국민의 일반 상식 수준에서 ‘동학’은 “최제우가 서학(西學)에 반대하기 위하여 유불선 삼교를 종합하여 만든 종교”라고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벌써 수십 년째 되풀이하고 있지만, 한번 잘못 인식된 역사관을 바로 잡기란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박맹수 교수는 말한다. “이제 120년 된 지금, (동학/농민혁명의) 바로 그 진정한 의미를 되물어서 살려 내는 새로운 첫 출발의 해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으로 가는 상서로운 조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0년 동안, 살아 있는 동학을 찾아온 박맹수 ? 이제 동학을 동학답게 이야기하자!
1980년대 초,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동학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동학’이라고 하면 ‘전라도-고부-만석보-전봉준-우금치’가 상식의 거의 전부였고, ‘전봉준=농민=민중운동’이라는 도식 속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러한 1980년대 초반에, ‘동학’의 더 깊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수운 최제우와 경주 그리고 해월 최시형”에서부터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화두를 붙잡고 ‘고독한 여행’을 시작한 이가 박맹수 원광대학교 교수(원불교교무)이다.
그날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노다공소(勞多功小)의 방식―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료를 발굴하고 실제에 입각한 연구를 해 나가는 그 방식으로 동학의 진면목을 밝히고, 지금도 이를 계승하는 운동을 실제로 전개하고 있는 연구자요, 실천가요, ‘우리 시대의 동학 선생’이다. 이 책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에는 이러한 사명의식 속에서 고뇌하고 공부하고 실천해 온 박맹수 교수 자신의 역정을 바탕으로 써낸 글들을 담았다.
동학은 「우리나라의 학문」이요, 「세상을 살리는 길」
동학을 생명의 눈으로 보자는 것은 동학을 원래 없는 방식으로 새로 고쳐 보자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본래 모습을 보자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다.
예컨대, 생명의 눈으로 보면 동학에서 동(東)은 서(西)를 반대하고, 서에 대항하기 위한 동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학으로서의 ‘동’이요, 생명·살림, 빛, 광명의 뜻을 내포하는 의미의 동(東)이라고 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선생이 “동학과 서학은 운(運)과 도(道)는 같되, 이(理)만 다르다.”고 한 데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지금 다시 동학인가? 120년, 두 갑자 만에 맞이하는 갑오년(甲午年)이라고 하는 것은 지엽적인 계기일 뿐이다. 지금의 시대가, 동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동학이 창도(1860)되던 때로부터 동학농민혁명이 발발(1894)하던 전후, 즉 19세기 하반기를 돌이켜보면, “밖으로는 서세동점이라는 서양 열강의 침탈 위기, 안으로는 삼정문란이라는 내적 위기, 여기에 괴질(怪疾-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들)이 10년 간격으로 유행하고, 기근과 흉년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이를 지금, 20세기 후기에서 21세기 초기의 반세기와 비교해 보면, 밖으로는 신자유주의 물결과 일본-중국-미국-러시아의 각축 속에서 부대끼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요, 안으로는 부의 양극화와 국정의 혼란 속에서 또는 기상이변이라는 자연적 재앙과 급격한 노령화와 출산율 저하 같은 사회적 재앙이 중첩되는 가운데, 맞벌이를 넘어 세 가지, 네 가지 직업을 가져도 내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은 물질주의에 파묻히고, 소비(명품)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영혼을 낭비하는 시대이다. 한마디로 살아가는 시대가 아니라 죽어 가는 시대이다.
동학,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동학창도―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역사적 세태를 거슬러 오르며, 생명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상이자 실천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학교단(敎團)―동학도(徒)―(동학)농민(農民)―동학농민혁명(革命)은 일이관지하는 일관성이 있다. 거기에서 해월과 전봉준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서로 만나고 “동학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점에는 뜻밖에도 ‘유무상자’와 같은 말들―그 말이 지향하는 세계와 그에 매료된 농민들―이 있다. 유무상자(有無相資)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나눈다.”는 말이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눈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돈이나 옷이나 밥(糧食)이 있거나(有) 없을 수(無)도 있고, 양심이나 지식이나 문벌이나 정의로움이 있거나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독점하지도 않고, 없음에 구애되지도 않는 그 ‘나눔’의 정신과 실천이다. 그 맛에 길들여진 동학도들은 그 유무상자를 나라 전체에, 나아가 조선과 서양 세력 사이에 골고루 펼쳐 내고자 했다. 그 결과로 불꽃처럼 타오른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유무상자의 전통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그 ‘경제적’인 계기만 놓고 본다면, 오늘날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전통 속에 놓인 담론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적을 죽이지 않는 전쟁을 꿈꾸다!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동학농민군 전략의 핵심은 ‘싸움’과 ‘죽임’과 ‘승전’이 아니라 모시고(侍天主), 섬기는 데(事人如天) 있었다. “동도대장(東道大將=전봉준)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적의 목숨만은 해치지 아니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 진실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해쳐서는 아니 되며….” 같은 구절이 이를 여실히 지적해 준다.
이 책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은 “살아 있는 해월 최시형”으로 불린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생명 철학으로서의 동학 현현’에 끼친 공로와 박맹수 교수에게 ‘생명의 눈’을 뜨게 해 준 은덕에 관련한 이야기, 오늘날 “동학의 생활 속에서의 실현”이 되고 있는 ‘한살림’의 내용과 의미, 일본 3.11대진재(핵발전소사건)의 문명재(文明災)로서의 의미와 일본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동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한-일 시민 간에 동학을 매개로 한 풀뿌리 교류의 현황과 전망, 일본의 사상사와 민중운동사에서 동학적 인물(다나카 쇼조)의 조명, “혁명으로서의 동학”에 대한 조명 등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