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온 윤재와 소정은 윤재가 몰고 온 차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찾는 윤재를 바라보며 소정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그가 건네준 것은 쪽지였다. 편지를 쓰기엔 아주 작은 크기의 메모지. 반듯하게 접힌 쪽지를 편 소정은 그 안에 적인 글자가 주소라는 것을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군대 간 남자친구한테 편지 써보는 게 소원이었다며.” “그 군대랑 다르잖아요.” “그냥 군대보단 더 많이 힘들고 외롭지. 그러니까 매일 매일 편지 써.” “그럼 답장도 매일 매일 보낼 거예요?” “아니.”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소정은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전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나쁜 남자, 차가운 남자는 질색이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지 악 다문 턱 근육이 연방 씰룩였다. “권미 씨가 얘기했구나.” “뭘요? 무슨 얘기요?” 나름 시침을 떼보았지만, 무슨 얘기인지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그가 갑자기 진지하고 깊어진 눈을 하고 시선을 맞춰왔다. “지금 확실히 해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부담스럽겠지만 솔직하게 대답해줘.” “되게 겁주네. 뭔데 그래요?” 심장이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덤덤한 척하고 싶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긴장이 돼 가슴이 너무 떨려 손까지 벌벌 떨렸다. 숨을 고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던 소정은 파르르 떨리는 눈매에 한껏 힘을 주고 방긋 웃었다. “난 요즘 매일 매일이 즐겁고 행복한데…… 소정 씬 어때?” 조심스러운 그의 물음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집어 삼키며 소정은 손을 뻗어 그의 커다란 손 안에 제 손을 밀어 넣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아니, 모르겠어. 말해줘. 나 혼자만 들뜨고 설레어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줘.” 조금은 성급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갈급한 사람처럼 보채고 재촉해줘서 고마웠다. 소정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열흘 전, 퇴근 후 기타 레슨해주러 왔다가 잠깐 의자에 앉은 채로 졸던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액정화면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몰래 찍었어요. 보고 싶을 때마다 보려고. 그리고 하루 종일 윤재 씨 퇴근 시간만 기다려요. 많이 피곤하다는 거 알면서도 오지 말란 소리 못했어요.” 이기적이지 못한 윤소정이 처음으로 부린 욕심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피곤할 테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열두 번도 더 말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피곤해하는 모습 볼 때마다 미안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싶진 않았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같은 건 잠시 모른 체 하고 마음 가는대로 욕심을 부렸었다. “난 재고 따지고, 밀고 당기는 거 할 줄 몰라요.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게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래서 그런가 봐요. 바보같이 마음 하나 숨기지도 못하고 윤재 씨한테 다 보여줬어요. 그런데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꼭 말로 해줘야 해요?”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바람결에 날려 흩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가지런히 넘겨주며 엄지로 조심스레 얼굴을 매만졌다. “한번 안아보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강한 힘으로 상체를 끌어 당겼다. 강인하고 넓은, 따스하고 포근한 그의 품 안에 안긴 탓에 미간이 구겨질 만큼 가슴이 미어졌다. “윤재 씨를 볼 때마다 불안해요. 해준이랑 같은 일을 하기에 어쩔 수가 없어요. 윤재 씨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혀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요.”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그 불안함을 입 밖으로 꺼내버리면 정말 그런 일이 생겨버릴 것만 같아 잊으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와 나를 가로막는 유일한 벽. 생각 하고 싶지도 않은 만약이라는 것. 사람들은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를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소정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었다. 두 번은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가 비행을 하는 이상 매일 매일을 가슴 졸여야 하기에 너무나 벅찬 장애물이었다. “그래도 해보자. 한번만……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한번만 해보자…….”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간절한 그의 말에 소정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지금의 이 선택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소정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이것이 유일했기에 흐르는 눈물을 그의 가슴에 묻으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제발…… 이 사람을 지켜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