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정 원림은 초연정과 주변의 외원을 포함하여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정자가 대부분 풍경이 수려한 강변이나 구릉에 지어져 확 트인 경관을 감상하는 것이 목적인데 반해 초연정은 마을 뒷산의 깊은 계곡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매우 드문 형태라 할 수 있다. 초연정에서는 나무에 가려져 바로 앞에 흐르는 계곡은 보이지 않으나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p.64
죽서루와 오십천의 비경은 옛날부터 많은 묵객들의 화폭에 담겨져 왔다. 조선 후기 화가들 사이에 실제 자연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화풍이 유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진경산수화다. 당시 화원들은 전국의 유명한 경승지를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단양팔경, 금강산, 관동팔경 등의 아름다운 절경이 화제가 되었다. 특히 죽서루와 오십천은 그 모습이 빼어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강세황, 엄치욱 등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이 그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p.129
구담봉 바로 위에 위치한 장회나루 건너편의 말목산 자락에는 이황의 연인 두향의 무덤이 있다. 이황이 빼어난 경치에 그토록 감탄했던 구담봉에서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구담봉을 중심으로 장회나루 부근은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의 향기가 서려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월암 이광려는 퇴계 사후 150년 뒤 두향의 묘를 참배하고 “외로운 무덤이 관도변에 있어 거친 모래에 꽃도 붉게 피었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에 강선대 바윗돌도 없어지리라”는 시를 한 수 헌사했다. 퇴계를 향한 마음을 평생 변치 않았던 두향을 기리고자 퇴계의 후손들은 지금도 두향의 무덤에 참배하며 관리하고 있다.--- p.147
사인암은 마치 해금강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석벽이다. 깎아지른 듯 하늘을 향해 뻗은 수직의 바위가 거대한 단애를 이루고 암벽의 정수리에는 늘 푸른 창송이 꼿꼿이 자라고 있다. 사인암은 기품이 넘치는 장엄하고 우뚝한 자태를 자랑한다. 바둑판 모양이 선연한 암벽의 격자무늬와 푸른 노송의 어우러짐은 기묘한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운계천의 맑은 물이 푸르고 영롱한 옥색 여울이 되어 기암절벽을 안고 도는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난 운선구곡의 하나다.--- p.175
해인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다. 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바로 부처(佛)와 부처의 가르침(法),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승려(僧)를 말한다. 이를 삼보라 하여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 중에서 이러한 세 가지 보물의 으뜸 역할을 하는 사찰이 있다. 불보사찰로는 양산의 통도사, 승보사찰로는 순천의 송광사, 법보사찰로는 합천의 해인사다. 법이란 부처님의 말씀, 즉 석가여래의 지혜를 의미하는데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진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는 불교경전의 성지이므로 법보사찰이라 함은 당연한 일이다.--- p.236
일본에서는 ‘구다라’라는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어떤 물건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 ‘구다라나이(쓸모없다)’라는 말을 상용어로 널리 쓰고 있다. 구다라는 큰 나라, 즉 백제를 의미하는 단어로 ‘구다라나이’를 직역하면 ‘백제의 것이 아니다’는 의미라고 한다. 백제가 아니면, 또는 백제의 것이 아니라면 모두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된 것은 백제를 내왕한 일본의 배들이 백제 왕도의 포구 이름인 ‘구드래’를 국명으로 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나루터는 사비시대 백제 도성의 포구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pp.282-283
용계정의 건물 뒤에는 세덕사지가 있다. 1778년에 건립된 세덕사는 이언괄 부자를 모신 사당이다. 명흥당, 진덕재, 입덕문, 연연루, 면수재 등이 지어지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용계정은 1800년대 들어 세덕사의 강당으로 사용되면서 강학의 처소로 변했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세덕사가 훼철되는 수난을 당했을 때, 용계정도 철거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마을에서는 용계정을 보존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세덕사와 용계정 사이에 담장을 축조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덕사만 훼철되고 용계정은 보존되어 오늘에 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