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조립공 미싱사 학원강사를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 1998년에 등단하여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민중열전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펴내고 전태일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받았다. 김해자 시인의 최근 5년 동안의 이름은 나르시소스.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타자의 소리를 듣지 못한 신화 속의 미소년이 아니라 자기를 진실로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안에 들어온 모든 형상과 형상 너머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노동자, 장애인, 사회운동가 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짬짬이 농사를 짓고 바느질을 하며 사는 노동자 나르시소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과 세상과 사람들의 활동사진을 모은 책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를 기점으로 노동과 놀이와 밥이 일치하는 코뮤니타스를 본격적으로 준비 중이다.
남들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참 어렵고 필생의 해결 과제가 되는 게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세상에 나온 나의 유일한 목적 아니겠는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가? 정답은 없다. 오직 나 스스로만이 해법을 갖고 있다. 나 자신을 과장하거나 방어하는 일 없이, 선악이나 도덕의 잣대에 비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된 자기를 회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참된 자기가 유일무이하고 이상하기 그지없는 바로 나니까.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중에서
우리가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자신과 자기 시대의 시련과 고통에 대해 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소박한 생활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과 기도, 관계맺음과 혼자 있음이 저절로 박자를 맞추며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어갈 수 있다면 갈등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겠다. 일을 도모하는 것과 자기의 내적 공간으로 물러나 있는 것은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만남과 혼자 있음이라는 상반된 경계에서 평온할 수 있다면 사실 모든 순간이 기도가 되겠다. ---「침묵과 말의 동거」 중에서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상처와 옹이는 살기 위해 만든 것, 상처도 실수도 죄조차도 살기 위한 것이다. 죽어버린 생명에 상처가 생길 리 없다. 죽음을 작정한 자에게 흉터가 새겨질 리 없다. 옹이와 상처는 더 큰 생명과 사랑을 품을 수 있는 통과 의례. 단단하고 지난한 어두운 시간대를 참으로 오래 견디며 통과한 존재만이 오래도록 타오를 것이다. 하여 오랫동안 세상을 환히 데워 줄 것이다. ---「불을 피우다」 중에서
찾아온 고통을 어떤 생각으로 채색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때 고통은 불행과 손잡지 않는다. 아픔을 죄의식과 원망과 불운으로 색칠할 때 불행이 된다. 온갖 해석과 이유와 탓을 거둘 때 나는 살아난다. ‘나는 슬프다’,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술어를 모두 거둘 때 변치 않는 나로 돌아온다. 수많은 지식이 인도하는 처방책조차도 다 잊고 지그시 견디는 것만이 고통을 넘어서는 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중에서
저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저를, 제가 생겨먹은 것보다 별 볼 일 없이 우습게 보아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기대도 낙망도 없기를, 저도 당신에게 그러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족쇄로부터 벗어나 천연의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기를. ---「당신이 등을 내주었던 것처럼」 중에서
오해 때문에 오래 격조해 있어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잘못했어도 잘못하지 않았어도 당신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상대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이 사랑으로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수신보다 중요한 건 내가 보낸 발신입니다.
김해자의 좌표는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나처럼 훌쩍 사람들을 떠나는 짓은 안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흔들리고 웃고 울고 춤추고 밭을 맨다. 십여 년 전 김해자를 처음 만난 이후로 참으로 한결같은 모습이다. 그녀처럼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껴안고, 지겨워도 긴 숨 내쉬면서 견디고, 상처를 받아도 떠벌리지 않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이 단단한 인간의 본성이 다행스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가 이 책에 담은 이들은 백석의 시구처럼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해하고 있으니, 그래 우리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게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부유하고 천박하고 시끄럽게는 살지 못하게끔 처음부터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하늘이 그렇게 했다니 그랬던 거구나, 아예 맘먹고 살자. 따지는 행위 중에 가장 효과 없는 게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 짓 아니던가. 더군다나 이렇게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보듬어주는 이 자그마한 여인이 있으니 걱정 없다. 한창훈(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