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우리 아빠와 함께 뛰는 날
--- 이용민 (shine@yes24.com)
나는 계단을 걷는 데에 서투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계단이라는 게 문득 떠오르면, 순간 멈칫 서버리거나, 괜히 넘어지려고 한다.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그렇다고 걸음마를 잘 못 배운 것도 아닐 텐데……, 하여간 계단은 나에게 익숙치 않다. 지난 가을, 명동 지하도 계단에서 출구만 생각하고 내려가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발목에 삐끗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인대가 심하게 다쳐 목발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래서 한달 간 나는 불편한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목발 짚는 데에 요령이 붙지 않아, 겨드랑이가 까져서 피가 나고, 불편한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고 하니 성한 다리가 너무 피곤했다. 그래도 오르막 길은 괜찮은데, 계단은 아무리 야트막해도 올라갈 수 없었다. (아마, 목발을 짚어본 사람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내 목표였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 보는 척 흘깃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다 알아채지 못할 호기심과 연민 또 그 무언가의 감정이 섞여 있는 듯 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더 힘들다. 장애인 본인 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불편과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인 진수도 그러했다. 진수의 아빠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다. 얼마 전 전학을 간 진수의 새 학교는 마라톤 대회를 전통으로 갖고 있는 학교로, 부모님과 함께 마라톤을 완주해야 한다. 이번에는 삼십 주년 기념 대회라 상품도 대단하다. 디지털 카메라 1명, MP3 1명, 문화상품권 30명, 전자사전 5명. 달리기에 자신이 있는 진수는 전자사전이 갖고 싶다. 하지만 진수의 아빠가 마라톤 대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게다가 작년에 동생을 낳은 엄마는 집안일 하랴, 아이 돌보랴, 아빠 도우랴 너무 바쁘시다. 누구에게도 마라톤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진수의 고민이 시작된다.
진수의 아빠는 돌 무렵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소년 시절, 시계포에서 일을 시작한 아빠는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 학교는 더 먼 곳에 있었고, 돈도 많이 들어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보석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빠의 보석 세공 기술은 뛰어나다. 그리고, 일과 가족만을 생각하시는 부지런한 분이시다. 아빠는 보석 세공 공부를 위해 외국의 보석 디자인 잡지를 보시는데, 전문적인 말이 많고, 영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하신다. 진수는 그런 아빠를 위해 전자사전을 타고 싶은 것이다. 속 깊은 진수이지만, 마라톤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진수는 반 쪽 짜리 아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차라리 아빠가 장애인이어도 몸이 좀 덜 불편해서 직장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전학을 오기 전, 아빠가 장애인이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진수의 말에 아빠는 학급 아이들 모두에게 하트 모양이 새겨진 자그마한 실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 때부터 진수는 따돌림 당하지 않았고, 학교에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대까지 만들어진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힘들게 사귀었던 친구들을 버리고 서울로 전학 온 진수. 아빠는 요새 진수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아빠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새 학교의 아이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신다. 비장애인 가정에서는 생각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장애인 가족은 느끼고 생각한다.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알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기도 쉽지 않다.
학교에서 학년별로 마라톤 연습을 하는 날, 진수는 민구를 제치고 보기 좋게 일등으로 들어왔다. 일등을 놓친 적 없는 민구에게 전학 온지 얼마 안 되는 진수가 강력한 경쟁자가 된 것이다. 역전패를 당한 민구는 화가 나서 진수를 장애인의 아들이라고 아이들에게 폭로하고, 교실 안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다. 드디어 미송 초등 학교 한 가족 마라톤 대회 날. 기가 죽은 진수의 눈에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아빠는 함께 일하시는 용규 아저씨의 육상 선수용 휠체어를 타고, 헬멧에 멋진 안경도 쓰셨다. 하지만, 전교생이 아빠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진수는 창피하기만 하다. 게다가 주위의 관심과 용기와 걱정 섞인 한마디, 한마디가 진수에게는 짐이 되었고, 아빠가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는 것도 보기 싫었고, 민구의 비아냥 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진수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진수가 아빠를 앞질러 가면 아빠를 놔두고 혼자 달린다고 할 것이고, 뒤쳐져 가면 왜 아빠와 함께 가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같이 가면 밀어 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휠체어를 미는 것은 반칙이다. 진수는 뒷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할 때 숲 속 오솔길로 들어가 버린다. 마음 같아선 그 안에서 영영 나오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결승선에 들어왔지만, 진수와 진수 아빠는 아직 골인하지 못했다. 숲 속에서 울며, 원망하던 진수는 아빠와 선생님이 함께 오시며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육상용 휠체어를 처음 모는 진수의 아빠, 게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고 내려야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진수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진수는 새롭게 마음을 먹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작가 고정욱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장애인이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안내견 탄실이』『괜찮아』『가방 들어주는 아이』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통해 장애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글을 쓰고 있다. 작가는 어느 날 아들에게서 마라톤을 한다는 가정 통신문을 받고, 아들과 함께 달리고 싶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책 표지를 보니, 그림의 아버지는 고정욱을 꼭 닮았다. 이 책은 어떤 바람직한 결론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각 주인공들이 서로의 몫에서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비장애인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장애우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현실감 있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