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 광신, 치 떨리는 열등감, 그리고 때로 국가 위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모든 것들이 근대 일본의 역사에 모두 한몫을 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특성이 다른 어떤 특성보다 일본을 잘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바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품이었다.
1853년부터 1868년까지 페리의 입항 후 쇼군 체제의 전복에 이르는 기간을 ‘바쿠후마쓰’ 또는 ‘바쿠후 말기’라고 한다. 바쿠후마쓰는 경박하고 다소 외설적인 ‘세기말’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서, 부패한 가부키 연극과 훨씬 뒤에 수많은 검투 영화에서 표현되는 음침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바쿠후 말기는 반란과 진압, 도쿠가와 충성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남서쪽의 봉건 영주들의 폭력적인 계략, 살인 음모들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사카모토는 나가사키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서구 정치 체제를 공부했다. 특히 유럽 헌법에 관심이 많았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였으나 총명한 두뇌를 가지고 1867년에 바쿠후 이후의 상태에 대해 매우 정교한 청사진을 그려내기에 이르렀다.…일본에 이런 정치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사카모토의 출신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대단한 문서였다. 이 문서의 많은 부분이 1년 후 바쿠후 통치를 종식시킨 메이지 유신의 서약 헌장에서 채택되었다.
메이지 헌법에서 규정한 일본 민주주의는 병약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헌법 정신에는 독일과 전통 일본의 전제주의가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것은 그 모호함이었다.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였다고는 하나 천황은 실제로 총사령관의 수장이 아니었다.…이처럼 연막과 베일에 싸인 정치가 이루어짐으로써 권력은 행위에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이 거의 견제되지 않은 상태로 행사되었다.
다이쇼 천황 요시히토는 재치가 없는 사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누렸던 경외를 상징적인 존재로서도 고취시키지 못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번은 그 딱한 인물에게 국회에 와서 체면을 지켜주기를 부탁했더니, 거기서 문서를 돌돌 말아 그것을 망원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는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1920년은 많은 일본인에게 최고의 해였다. 지구 저편에서 다른 이들이 싸웠던 제1차 세계대전이 그들에겐 행운이었다. 유럽 열강이 수많은 자원과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잃는 동안 일본은 배를 만들고 옷감을 수출하고 산업기계와 군수품을 유럽에 공급했다.… 1920년대 초는 특히 운동의 시기였다. 보통선거, 차별 받는 부락민들의 해방,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운동이었다. 요컨대 그 당시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시기였다.
우익 국수주의자들은 여전히 미국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는 ‘대동아전쟁’이란 전쟁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 명칭은 일본이 서구 제국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전쟁을 의미한다. 1941년 전에 중국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한 사변, 즉 작은 문제로 취급된다. 그 밖의 사람들도 미국에 대한 전쟁을 제외하고는 아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태평양전쟁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자국이 벌인 과거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좌익 세력들은 일본인에 의한 전쟁을 1931년 만주학살로 시작된 식민지 정복의 연속으로 보고, 그것을 ‘15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수년 동안 일본인들은 서구화를 배우는 학습장에서 문명과 개화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서방의 물질적 우월성을 따라잡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으로 행동하며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모두 콧대 높고 남을 깔보는 거만한 서구 때문에 희생당했다고 생각하였다. 이 모든 모욕감들이 진주만을 급습한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에 의해 일거에 해소되었다. 이제 일본인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갖게 된 것만큼이나 세계도 일본인들을 대단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자유민주당은 재빨리 ‘55 체제’를 자민당 체제로 만들었다. 대기업, 미국 정부, 고위층 관료, 보수적 농촌 지역에 유리한 선거제도 등에 힘입어 자유민주당은 엄청난 정치기구를 형성하였다. 이 정치기구는 돈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건설회사, 범죄 집단, 기업, CIA 뇌물, 무역회사에서 선거비용이나 정부보조금의 연계망을 통해 돈이 흘러 들어왔다. 그 돈은 지역구 선심 사업으로 유권자들에게 전해졌으며, 의회에서 종신직을 기대할 수 있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이 이를 관리했다. 당내의 파벌은 권력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번갈아 당의 당수와 총리를 역임했으므로 그들 모두 돈을 챙길 수 있었다.
1960년 11월에 발표된 소득배가 정책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헌법 문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계획적인 조처였다. 돈으로 무엇보다 용이하게 일본사회당의 중도파를 매수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추구하게 되자 정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자유민주당이 집권하는 온정적 국가에서 안정과 번영이 보장되었으며, 유능한 전문기술 관료들이 일본의 경제를 담당하여 국가의 안녕을 위해 이끌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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