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의 정체
한중일 3국의 정사인 <삼국사기> <사기> <일본서기>는 나름대로의 고대사를 정리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국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실제 역사를 엄청나게 왜곡시킨 책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을 흔히 동이족이라 하는데, 동이·서융·남만·북적의 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우리말에서 ‘이이, 저이’라고 할 때의 이(夷)와 마찬가지로 동이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었다. 이 동이를 동쪽 오랑캐의 개념으로 바꾼 것은 동이족의 삼황오제 정권을 뒤엎고 하나라를 세운 하족(夏族)들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하나라를 뒤엎고 은나라를 세우며, 하족은 다시 은나라를 뒤엎고 주나라를 세운다. 동이족의 진시황은 다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나, 하족이 진나라를 뒤엎고 한나라를 세운다. 이렇게 보면 중국 대륙은 삼황오제→은나라→진나라의 동이족과 하나라→주나라→한나라의 하족 또는 한족의 끊임없는 대결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나라 무제는 사마천과 정치적 음모를 꾸민다. 과연 사마천의 <사기> 편찬 이후 중국 대륙에 거주하던 동이족은 다음 세대부터 모두 사라지고, 중국 대륙 밖에 있던 우리 민족만 동이족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역사 편찬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축소된 역사
비슷한 일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초기 왜나라를 건설했고 열도로 이주해 살던 수많은 삼한인들이 <일본서기>의 편찬 이후 모두 일본인으로 둔갑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도 북쪽에서는 발해를 빼버림으로써 한반도 밖에 있던 우리 민족을 만주인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작금 중국이 동북공정에 의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드는 빌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에 뒤이어 일어났던 금나라나 후금의 여진(女眞)은 만주 지방에 있던 숙신(肅愼), 식신(息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주진(珠眞) 주선(州鮮) 등과 함께 ‘죠선’ 또는 ‘츄선’ 등으로 발음되는데, 이는 모두 조선(朝鮮)에서 나온 것이다. 시대에 따라 이들 주민의 명칭을 중국인들이 다르게 표기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처음에는 중국 대륙 그 다음에는 만주, 그 다음에는 열도를 잃고 한반도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왜나라를 건설한 한민족
『연개소문을 생각한다』는 특히 가야인이 열도에 세웠던 왜나라가 왜 <일본>으로 둔갑하면서 다른 나라가 되었는지 연개소문의 족적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해보려 한 책이다. <산해경>에 보면 왜나라는 본래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백제가 성장하면서 더 남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다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국력이 크게 쇠미해지면서 열도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가 시도 때도 없이 왜의 공격을 받는데, 이때의 왜는 열도에서 건너온 왜가 아니라 신라 옆에 있던 왜, 다시 말하면 가야인을 가리킨 것이다. 왜나라의 뿌리가 가야인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는 일본의 건국설화에 있다. 일본의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장소는 구지후루(久士布流) 봉우리인데, 이는 가야 수로왕이 내려왔다는 구지봉(龜旨峰)의 ‘구지’와 지명까지도 그대로 일치한다. 따라서 왜나라 천황의 시조는 가야인이었다.
연개소문의 망명 동기
그러나 한때 가야 땅이었던 한반도 남부지역에 세력을 넓힌 백제가 가야인을 뒤따라 열도로 건너간다. 이 과정에서 가야인과 피나는 싸움이 벌어졌지만 결국 백제계가 승리했고, 이후 왜나라 천황가는 백제계가 장악하게 된다. 7세기의 왜나라 서명천황은 백제 무왕을 모델로 한 가공인물이며, 그 다음의 황극천황과 제명천황은 백제 무왕의 아내였고, 중궁천황은 백제 무왕의 딸이었으며, 천지천황은 백제 무왕의 아들이었다. 이처럼 백제와 왜나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당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던 당나라와 맞서기 위해 돌궐, 구자국, 말갈, 사마르칸트, 위구르 등의 북방민족들을 끌어들이고 남으로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만들지만, 북방의 강국인 돌궐이 당나라에 패하고, 남쪽의 백제가 무너지게 되자 고구려를 도울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택하게 된다.
역사의 복원
그러나 백제 무왕의 아들인 천지천황과의 알력 때문에 고구려에 원군을 보내지는 못한다. 마침내 고구려가 멸망하자 연개소문은 왜나라에서 정변(임신의 난)을 일으켜 천무천황에 즉위한다. 이 과정에서 연개소문을 도운 것은 신라 문무왕이었다. 그는 정변중 김압실 장군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연개소문을 돕게 했는데, 신라 파견군이 싸웠던 장소는 아직도 일본에 이만향(二萬鄕)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우리나라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일본의 고대 사서들과 그 간의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1972년 일본 나라현 아스카무라에서 고송총이라는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보수적인 일본 사학계는 이 고분이 북위(北魏) 계통의 무덤이라고 얼버무렸으나, 일부 양심적인 일본 사학자들은 이 무덤이 고구려 계통이며, 더 정확히는 연개소문의 무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뚜렷한 천하관을 갖고 있던 고구려의 자주정신이 연개소문의 망명으로 엉뚱하게 일본에 이식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만하다. 역사란 내일을 위해 오늘 쓰는 어제의 이야기다. 턱없이 축소된 우리 고대사를 복원해내는 것이야말로 다시금 세계로 웅비해야 할 우리 모두의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