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임금인 선조는 도산서원에 대해 나라에서 편액을 내리기로 하고, 당대 최고 명필인 석봉 한호에게 편액 글씨를 쓰게 하기로 결정했다. 1575년 6월 어느 날, 선조는 석봉을 어전에 불러 편액 글씨를 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 알려 주지 않고 부르는 대로 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라고 하면, 젊은 석봉(당시 32세)이 퇴계와 도산서원의 명성이나 위세에 눌려 글쓰기를 양보하거나 마음이 흔들려 글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순서는 거꾸로 하기로 했다.
선조는 그에게 첫 글자로 집 ‘원院’자를 쓰라고 했다. 석봉은 ‘원’자를 썼다. 다음은 글 ‘서書’자를 쓰게 하고, 이어서 ‘산山’자를 쓰도록 했다. 석봉은 쓰라는 대로 여기까지는 잘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편액 글씨를 쓰는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았다. 바로 질그릇 ‘도陶’자다. 이 자를 말하면 석봉도 도산서원 편액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는 ‘도陶’자를 쓰라고 했고, 석봉은 그때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자를 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붓을 떨며 가까스로 ‘도’자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쓴 ‘도’자가 다른 세 자와 달리 약간 흔들린 흔적과 어색한 점이 있다고 전한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본문 122쪽)」중에서
이야기 둘
‘애일당愛日堂’ 편액 글씨와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농암은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최고 명필의 글씨를 받아 오게 했다. 제자는 몇 달 만에 중국에 도착했고, 다시 그 명필을 찾아 한 달을 헤매었다.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수소문해 찾아 ‘애일당’ 글씨를 청했다. 그 사람은 뭐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 자를 써서 내주었다. 하지만 농암의 제자는 명필의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다. 좋은 붓으로 정성스레 글씨를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때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명필은 끝내 써주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면 자신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 했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분이 저의 스승으로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 하여 써 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는 스승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한 마리는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돌아온 제자는 농암을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 주다가 그가 세상을 뜨면서 고백해 알려졌다고 한다.
---「경북 안동 농암 종택 애일당(본문 318~319쪽)」중에서
현판이란…
현판이란 주로 널빤지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건물의 문 또는 벽에 거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건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표지인 것이다. 현판의 역사는 대략 중국 진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면서 현판에 주로 쓰이는 글자체도 정리되었다. 진나라 8서체 중 여섯 번째인 서서(署書)가 건물의 명칭 등을 쓰는 데 사용됐다. 그 후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위탄(韋誕)이 능운대의 현판 글씨를 쓴 기록이 있고, 당대(唐代)에는 불교 사원이 건립되면 제왕이 현판을 하사하는 관습이 성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각종 문헌에 현판에 대한 기록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현판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성문, 전각, 사찰, 서원, 주택 등에 널리 현판을 걸었다.
현판에는 주로 나무판을 사용하고, 건물의 규모와 성격에 맞게 다양한 색과 장식을 더한다. 글자는 나무판에 직접 쓰거나, 아니면 따로 써서 새기기도 했다. 글자에는 먹은 물론이고, 아교에 금가루를 섞은 금니(金泥), 조개껍질을 갈아 만든 호분(胡紛) 등 갖가지 재료를 사용했다. 건물의 얼굴인 현판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냥 보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현판에 쓰이는 글씨도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다. 굵은 필획으로 써서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해진 글씨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짜임새가 있고 강건하게 보이는 해서(楷書)가 많이 쓰였다. 특히 유행한 것은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온 ‘설암체’나 조맹부의 ‘송설체’ 등이었다. 설암체의 경우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다. 물론 해서 외에도 전서나, 예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글씨체가 사용되어 지금도 전국 곳곳의 서원, 사찰 등에서 그 현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부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