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은 첫 만남 이래로 지금까지 쭉 그녀의 우상이었다. 항상 필요 이상의 관심과 애정을 주는 그의 가족들과는 차별되게 세진은 특별히 잘해주지도 딱히 못해주지도 않는 일정 선에서 은주를 대했다.
멋모를 초등학교 저학년 땐 그의 어중간한 태도에서 불안을 느꼈다. 그가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불안은 좌절이 되고, 좌절은 괴로움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곧 눈물로 표현되었다.
세진은 늘 바빴다. 평일에는 학원을 다니느라 그랬다 쳐도 주말조차 집에 있는 법이 없었다. 친구와 어울려 논다고 귀가시간은 밤 10시를 넘기 일쑤였다. 많이 보았자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게 다니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한집에 사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은주도 새로운 학교생활과 학원, 새로 사귄 친구들과 나름 바쁜 나날을 보냈으나, 학교 친구들보다 세진과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가까이 다가가면 밀어내진 않았다. 거리를 두려는 행동에도 딱히 관심 두는 법 또한 없었다. 그게 못내 서운했었다. 그녀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가끔씩 마주칠 때면 서툴지만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는데, 그 때문이라도 작은 기대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세진의 사소한 태도에서 발현되는 소소한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불연속 스펙트럼의 무지갯빛 단절처럼 행복과 서운함이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세진의 행동반경과 무관심은 여전했고, 의무적인 친절함을 제외하면 그와 그녀의 사이는 멀어지지도 가깝지도 않은 처음의 거리 그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은주의 나이 열 살 때 일이었다.
「은주, 오랜만이다. 학원 잘 다니고 있냐?」
「으응. 그런데……, 어디 가?」
「약속.」
「안 가면, 안 돼?」
평소와 다르게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아이 같은 응석에 세진은 은주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인지 웬만해선 꾀를 부릴 줄도, 요령을 피울 줄도, 하다못해 어리광마저 모르던 은주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겐 이곳 생활이 동화 속 세상처럼 환상과도 같았던 것이다. 초기 3개월 동안은 꿈같은 생활이 진짜 믿겨지지 않아 때때로 잠을 설칠 정도였다. 악몽을 꾸다 새벽녘에 잠이 깰 때면 공주풍의 귀여운 방과 프릴의 침대 시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현실을 제 자신에게 각인시켰다. 행여나 지현의 가족에게 밉보여 쫓겨나면 어쩌나 싶어 쥐 죽은 듯 지냈다. 반찬투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무슨 일이든 지현이 하자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분을 파악하려는 아이답지 않은 행동에 그들이 더욱 애잔함을 느꼈음을 은주 자신은 전혀 몰랐다.
「오늘 성훈이 형 생일이라 빠지기 좀 그래. 다음에 놀아줄게.」
다정한 목소리지만 선을 긋는 말투에 은주는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서둘러 작은 머리통을 끄덕끄덕했다. 작은 손으로 그러쥐었던 세진의 옷을 놓아주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문을 열고 나가는 세진이 미워서 몸을 팽 돌았다. 결국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도……, 오늘 생일인데.」
한 울타리에 살게 된 이후, 두 번째로 맞는 생일이었다.
첫 생일도 세진 없이 보냈었다. 파티를 해준답시고 지현과 세영이 분주하게 집 안을 꾸미고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사왔으나 은주의 마음은 휑하기만 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따라 아픈 법이다.
결국 갑자기 열이 끓어올라 생일음식을 채 삼키지 못하고 몸져누워야 했다. 고작 열 살 꼬맹이가 사랑을 어찌 알겠냐마는 당시는 사랑이라기보다 동화 속 왕자님을 보듯 동경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껄렁한 자세나 간혹 가다 얼굴에 상처를 입고 들어오는 것들이 왕자와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에도 그녀에게만은 연예인 못지않게 멋져 보였던 것이다.
「은주가 많이 아프다고요?」
아파서 누워 있는데 어렴풋이 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냥 서러운 맘에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뭐라 뭐라 주고받는 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괴상하게 늘어졌다 휘어졌다 했다.
한번 앓고 난 뒤, 몸이 완쾌되고 은주는 조금 달라져버렸다. 늦은 밤, 애써 잠을 쫓으며 세진을 기다리던 과거와 달리 애초에 기대감이 없었다는 듯 행동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세진에게 목말라 하는 시선을 던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진의 그림자가 보일라치면 작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려 숨어 있기 일쑤였으니, 그의 입장으론 일부러 그러했으리란 가정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진에게는 단지 이삼일에 한 번씩 보여야 할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이 최근 들어 볼 수 없었다는 아쉬운 마음이 다였으리라.
그렇게 피해 다니기 일주일, 어느 주말 저녁에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노는 건 좋다만 세진이 너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네, 아버지.」
「아빠, 얘 말 믿지 마세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담배를 피우질 않나, 술을 마시질 않나. 하여튼 날라리 고삐리라니까요?」
「누나!」
저녁식사 이후 대화는 식탁에서 거실로 이동되었다.
은주는 세진과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지현 옆에 콕 붙어 앉아 최대한 몸을 숨겼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저번처럼 자꾸만 투정부리고 싶어서, 그리되면 세진이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정은주. 너 설마 날 피하는 거야?」
「어라, 그러고 보니 요새 은주가 세진이를 찾지도 않았었네.」
「야, 꼬맹이. 얼굴 좀 보자.」
세진이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울컥한 세진은 급기야 은주 몸을 들어 올려 억지로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너 왜!」
「우아아앙.」
지현과의 첫 만남을 제외하고, 항상 방긋방긋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였다. 세진은 당황하여 작은 몸을 내려주었고, 은주는 움찔움찔 떨며 지현의 품으로 제 몸을 쏘옥 묻었다. 울음이 겨우 잦아들어서야 지현이 달래듯 말했다.
「우리 예쁜 은주가 왜 울었을까? 혹시 세진이 괴롭혔어? 아줌마가 확 혼내줄까? 세진이 때려줘?」
「아, 아니요.」
「그럼 왜 울었어? 응? 아줌마한테 말해봐.」
「오빠가…….」
「세진이가 왜?」
「세진 오빠가 날 싫어해요.」
「그럴 리가 없잖니?」
「나, 나랑 놀아주지도 않, 항상 바쁘고, 말도……, 잘 안 하는걸요?」
말을 뱉고 나서야 정말 세진이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투정까지 부렸으니 이제 더욱 귀찮아할 것이라 단정하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앞으로 본체만체하면 어쩌나 싶어 눈물을 더 서럽게 쏟아냈다.
은주의 발언으로 세진은 세영에게 몇 대 쥐어 터지는 억울함을 맛봤다.
그만 놀러 다니고 은주랑 놀아주라는 엄명이 떨어지기도 했다. 세진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럽게 우는 은주를 번쩍 들어 방으로 데려가 침대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
「뚝!」
「미, 미안해.」
「나랑 놀고 싶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눈에 루돌프 코가 되어버린 얼굴이 귀여워 세진이 피식 웃었다. 왕자님 같은 미소에 은주가 넋을 잃고 올려다봤다.
「좋아. 그럼 널 내 졸병으로 임명하마.」
「졸병 싫은데.」
「어허, 그럼 안 놀아준다?」
「아, 알았어. 졸병 할게…….」
은주는 추억에 젖어 교복을 벗다 말고 책상 근처로 갔다.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어 졸병의 증표라며 받았던 맥가이버칼을 꺼냈다.
열 살짜리에게 칼을 주다니. 당시 무슨 생각으로 세진이 이걸 자신에게 줬는지 어릴 땐 몰랐는데 조금 크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뭐긴 뭐야. 주머니에 있던 게 이것뿐이었겠지.”
무심한 인간 같으니라고.
급히 뛰어오느라 머리가 엉망이다. 땀도 흘리다 찬 기운에 식어서인지 눅눅한 냄새가 밴 듯하다. 이런 진득한 몰골로는 세진을 맞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맥가이버칼을 도로 집어넣고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쳇, 유치하게 졸병이 뭐야, 졸병이. 순수한 마음을 짓밟아도 유분수지.”
구시렁거리다 말고 혀를 빼물며 샐샐 웃어버린다. 그때가 전환점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