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애와 은자가 녹지대에 나가기 시작할 무렵, 이곳의 리더 격인 음악에 조예 깊은 신문기자 한철이 “여기 왜 왔어?” 하고 물었을 때 인애는 “비상구를 찾으려구요.” 그러나 은자는 “밀폐되고 싶어서요. 인애 말은 글렀어요. 여기 비상구가 어디 있어요. 지하실인걸요.” 하며 깔깔거리고 웃던 소녀였다. “선생님은 여기 왜 오세요?” “나? 여긴 휴게소야.” 1권 ---p.26
잠꼬대같이 매듭지어지지도 않고 알맹이도 마음에도 없는, 그리고 멋조차 빠져버린 농담들을 주고받으면서 허황하게 비틀거리며 그들은 간다. “녹지대에도 이제 종말이 온다.” 안경잡이가 유행가의 가락처럼 뽑으니 “겨울이 와서?” 하고 키 작은 치가 맞장구를 친다. “흥! 녹지대에도 세대 교체는 필요해. 우린 늙었어.” “굵게 때린다.” “우리들이 돌아갈 곳은 이제 고향이다.” “탄광은 아니구?” “정말 시시해졌다!” 안경잡이는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다. 어둡고, 그러나 여전히,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 “미쳐서, 발광이 나서 다 쏟아져 나온다. 한국의 문화는 모두 이 거리 위에 쏟아져 있다! 깡통 지붕의 움막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온 족속들의, 그래도 가짜 다이아 반지 낀 손으로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모퉁이 거리는 문명과 문화의 홍수다! 움막은 산꼭대기로 쫓겨 올라가도 이 찬란한 전시장, 명동의 거리는 확장할 필요성이 있어!” 되지도 못한 소리를 지껄이다가 스스로 싱거워졌는지 그만둔다.
이 소설은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시대의 불모성을 뛰어넘어 그 이후를 설계하려는 1960년대인들의 심리 및 의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6?25 전쟁이 부른 죽음과 폭력과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고, 때문에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체념과 그 현실에서 떠나고자 하는 도피 욕구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을 빚었으며, 그러면서도 그러한 모순적 심리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의미를 정관하고자 하는 정신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방민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녹지대』는 전후를 배경으로 다양한 양태의 사랑서사를 펼치고 있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치열한 사랑’은 사랑 서사로서뿐만 아니라, ‘죄의식’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박경리 문학의 새로운 특색을 드러낸다. 박경리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제2세대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꿈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김은경 (KAIST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