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미술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자유롭게 흩어져 학교 주변의 정경을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저는 친구와 함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연못을 그리기로 했지요. 옆 건물이 드리워준 그늘 덕택에 연못 주변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지요. 연못은 해캄이 잔뜩 껴서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구요. 그래서 저는 연못은 짙은 초록색으로, 바위는 짙은 회색으로… 그렇게 그림을 그렸어요. 얼마쯤 지났을까요. 우연히 맞은편에 있던 친구의 그림을 슬쩍 보게 되었어요. 근데 연못이 저와는 많이 다른 거에요. 제 친구가 그린 물빛은 파란색이기도 했다가, 맑은 청록색이기도 했다가, 심지어 어떤 때는 보라빛이나 연두빛이기까지 했어요. 친구는 미술학원에서 이렇게 배웠다고 했어요. 친구의 그림을 보고 연못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저는 아무리 봐도 짙은 초록색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요. 그리고 몇주 후, 친구의 그림은 예쁜 액자 속에 넣어져 복도에 전시가 되었어요. 좀더 큰 뒤에야, 그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쓰던 색채분할의 한 기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 받은 충격은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 새겨졌지요.
"그림책에서 글은 그림을 반복하지 않으며, 그림도 글을 반복하지 않는다.”저에게는 어느 유명한 그림작가의 이런 정의가 있기 전부터, 그림책을 볼 때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답니다. 아무리 좋은 글도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손이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만난 작가가 바로 미국작가 ‘바버라 쿠니’입니다. 왜 좋니? 라고 묻는다면, 사랑에 대한 잠언처럼 “그냥”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하지만 누군가 좀더 궁금한 눈치로 쳐다본다면, 위에서 설명했던 초등학교 미술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바버라 쿠니의 <달구지를 끌고>와 <바구니 달><에밀리> 등에서도 이미 보아왔듯 그녀의 그림에는 ‘혼합’이라는 것이 없어요. 나무는 초록색, 물은 파란색, 대신 한가지 색이라도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색감을 가지고 표현되어 있지요. 굳이 원근이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때론 돌담길이나 오솔길이 지면에 그대로 발라당, 누워있기도 하구요. 그런 천진함은 우리 전통 민화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인데요, 저는 아이 같은 그런 꾸밈없는 시각이 참 좋답니다.
92년작 <강물이 흘러가도록>은 뉴잉글랜드 쿼빈 저수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쿼빈 저수지가 아직 ‘스위프트 강’이었을 당시, 그곳엔 야트막한 골짜기와 부지런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1927년부터 시작된 댐건설로 인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지요. 글작가 제인 욜런은 이 책에서 마을에 살고 있던 여섯살박이 ‘제인’을 통해 이 과정을 담담히 들려주고 있습니다. 낮에는 갈색 송어를, 밤에는 개똥벌레를 잡으러 늦도록 뛰어다니고, 멀리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단풍나무 아래서 잠들던 유년 시절의 풍경이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펼쳐집니다. 하지만 이 마을이 댐 건설지로 선정되면서 마을사람들은 이주비를 받고 하나 둘 이사를 시작하지요. 칼 던지기 놀이를 하던 공동묘지는 무덤 이장을 위해 파헤쳐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벌목꾼이 모두 베어갔습니다. 오래된 돌방앗간이 불도저로 밀리는 것을 구경하던 제인도 곧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구요. 함께 뛰놀던 조지는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었어요. 그렇게 마을은 7년 동안 서서히 물에 잠겨 사라져 갔어요.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제인은 아빠와 함께 오랜만에 옛 고향을 찾아옵니다. 제인은 아빠가 저어주시는 보트 위에 앉아 그 옛날 과수원길과 교회 자리를 가늠해보지만, 망망한 물 위로 옛 자취를 찾아내긴 어려웠어요. 어느덧 날이 저물고 하늘엔 별들이 나타났지요. 물 위로 비친 별은 깜빡,깜빡 물결 위로 흩어졌지요. 그 순간 제인은 그 옛날 개똥벌레를 찾아다니던 밤이 떠올랐어요. 버드나무 가지에 스치던 바람을 기억해 냈지요. 선로를 따라 달리던 기차 소리와 세월 저편에서 엄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요. 이 코끝을 찡하게 하는 마지막 장면이 정말 압권이랍니다. 어떤 환경주의자들의 강렬한 구호보다 더 강하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림책! 글 작가 제인 욜런의 고백적 문체에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지는 글 그림 모두 강추 그림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