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우붕잡억』이 나온 중공중앙당교(中共中央黨校) 출판사입니다. 중국은 새로운 지도부가 조직되고 이념이 확정되면, 각급 지도자들이 새 이념을 재교육 받습니다. 그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 중앙당교이고, 그곳의 출판물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중공중앙당교 출판사입니다. 그럼 이런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 출판사의 이름으로 간행되는 책은 최소한 국가정책의 기조와 보조를 맞추리라는 것입니다. 혹시 일련의 비화, 비록의 간행은 국가지도부의 메세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앞으로 문화대혁명과 같은 비극은 없다. 그러니 지식인들이여 안심해라! 『우붕잡억』도 1992년에 완성되었지만, 위 출판사의 권유로 간행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 무렵, 중국의 대학교는 외국에 유학했던 중국인 과학자를 거액의 연봉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합니다. 한때 청화대의 한 교수가 엄청난 연봉을 받았다고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른바 ‘철밥통’이던 교수직이 연봉직으로 전환되고,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를 시작했습니다. 당 정책의 제시와 실천이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준비가 많이 되었던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당시 중앙당교의 교장이 호금도胡錦濤였습니다. 강택민보다 더 매끔하게 생긴, 신사형의 관료였던 그가 바로 중국 공산당이데올로그였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어떤 인물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지금은 그가 당 주석이 되어있습니다. 중국 지도부의 정책과 메세지가 옳은지 그른지 파악할 능력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은 지난날 경험을 곱씹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균형을 맞추며 비상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과거를 되씹는 데 인색한 편인 듯합니다. 그것을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사회적 홀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비록 완전하지 않아도 군사정권시절 보다 나아진 민주적 환경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 광주민중항쟁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광주조차 ‘광주’를 잊어간다고 합니다. 사상 유례 없는 국가폭력과 그에 맞선 항쟁을 올바로 평가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보고서조차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출된 적 없고, 무고한 영령들의 명예도 모두 회복된 것은 아니며 망각의 슬픔까지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10년재앙’을 뒤늦게라도 재검토하고 미래의 방향을 논하려는 중국의 태도와 망각되기를 방치하는 한국의 태도는 분명 차이 있습니다.
『우붕잡억』은 역사(자랑스럽든 부끄럽든)를 소중히 보듬어가고자 하는 지식인의 실천이요 책임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체험을 역사로 읽는 지렛대로 만든 서술태도가 궁금해졌습니다.
<감정과 이성의 사이, 춘추필법>
저희는『우붕잡억』을 읽으면서 묘한 긴장을 느꼈습니다. 터질 듯이 고동치는 감정과 그것을 절제하는 이성 사이에 형성된 팽팽한 갈등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인이라면 문화대혁명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우붕잡억』 이전에 이와 비슷한 책들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진개가陳凱歌는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푸른산, 1991)에서 홍위병시절을 회고했고, 김학철金學鐵은 『최후의 분대장』(문학과지성사, 1995)에서 팔로군이었던 혁명간부의 아픔을 술회했으며, 곽양옥郭良玉은 『고깔모자를 쓴 지식인』(청화학술원, 2001)에서 지식인으로서의 고통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상처는 모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들은 홍위병으로서, 혁명간부로서, 지식인으로서 다양하게 문화대혁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역사가 되기 위해선 객관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감정을 절제하고 냉정하게 서술하려한 『우붕잡억』은 하나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서술 원칙을 밝혔습니다.
첫째, 남을 욕하거나 감정적 서술을 하지 말 것.
둘째, 화합을 위한 목적에 맞게 이름을 노출하지 않을 것.
학자의 서술 원칙이라고 하기엔 다소 이상하지만 체험이 사감私感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읽었습니다. 이 원칙들은 책의 서두부터 거의 흔들림없이 지켜졌습니다. 다만 몸과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을 장난감 다루듯 했던 자에 대해서만큼은 욕을 했습니다. 그가 짐승보다 못하기에 이번만은 원칙을 깨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은 초고와 수정본은 아주 다른 글이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감정적 언사를 많이 고쳤다고 했는데, 감정의 과잉이 글의 긴장도를 떨어뜨리고 개인적으로 흐를까 염려해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행간 사이로 물그림자처럼 일렁이는 감정의 떨림은 오히려 선생님의 서술이 진심이요 사실임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우붕잡억』속에서 성도 이름도 밝히지 않은 경우, 성은 밝히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우, 성과 이름을 모두 밝힌 경우,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서술했습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록물이 대부분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저희는 이것을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겠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퍼즐게임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대를 살지 않았다면 그 게임은 실패로 끝나고, 결국 선생님의 뜻대로 당사자들에게는 경계가 되고 독자들에게는 과거 역사로 읽힐 것입니다. 다만 그 속에서도 사회주의 중국에 해가 될 비인간적 인물은 성명을 모두 밝혀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견줄 정도로 냉정하고 엄격했던 것입니다.
춘추필법은 객관 속에 포폄褒貶을 담아 후세에 경계하기 위한 역사서술 태도입니다. 우붕의 생활을 다채롭게(?) 그리고, 가끔은 냉소적으로, 가끔은 희화적으로, 또 가끔은 안타까운 눈으로 보면서도 견지하고자 했던 것은 이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우붕의 경험을 정직하고 가감없이 절제된 감정과 냉정한 포폄 속에 녹여내면서,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