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아경,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처음 들어올 때처럼 힘없이 철문을 열고 다시 나갔다. 철문은 끼.이.이.익, 하고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를 무사히 옥상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그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혼자 남은 그는 생각했다. ?아경! 나하고 이름이 똑같다니 신기하네. 쟤도 엄마가 싫어서 옥상으로 도망 온 것일까? 그는 다시 옥상 구석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어느새 8월의 늦여름 하늘 저편의 구름이 점차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갔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자 조금씩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할지, 막막했다. 엄마가 혹시 너무 걱정에 빠진 나머지 병이 나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자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하는 약한 생각도 따라붙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 p.17-18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너는 몰라도 된다고 말하는 그녀가 갑자기 멀게 느껴져서였다. 그녀에게 거부당한 것 같은 무안함에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두 팔로 무릎을 당겨 안으면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찢어진 티의 옷자락 사이로 뽀얀 겨드랑이 살이 살며시 드러났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다시 그녀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을 따라 그의 시선도 움직였다. 물론 그 부드러운 선은 얼마 가지 않아 옷에 가려 끊기고 말았지만 말이다. 문득 코끝에 그녀의 체취가 와 닿았다. 강아경이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좀 가까이 당겨 앉으려 하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깜짝 놀라 얼굴을 돌리며 벌떡 일어섰다. --- p.128
벗겨, 벗겨서 사진 찍어. 사진 찍어두면 더 꼼짝 못해. 그거 인터넷에 올릴까? 그래 그러자. 돈벌이 되겠는데? 벗겨라 벗겨라 벗겨라! 응원가를 부르듯 장난질을 치는 남자애들의 틈 사이로 그녀의 교복 셔츠 단추가 뜯겨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작고, 그래서 더 약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는 남자애들의 손아귀 속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찍어라 찍어라 찍어라! 누군가는 시계에 달린 캠코더로 영상을 찍고 누군가는 심아경에게 달려들어 옷을 찢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야. 이건! 강아경은 바로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뒷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전기가 통하듯 찌리릿, 하며 분노가 번개처럼 지나쳤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었다. 이런 개 같은! 강아경은 부르르 떨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p.173-174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시간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강아경…….” 그는 응, 하고 아이처럼 대답하며 발끝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심아경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응.” “네가…….” “응…….” “네가 있어줘서, 나 혼자가 아니어서, 그 시간들을 견딜 수가 있었어.” 그녀의 말에 발끝만 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하늘을 보았다. 어쩌면 눈이 빨개졌는지도 모른다. 심아경은 남자애가 우냐고 놀리는 대신, 나지막하게 준비한 말을 이어갔다. “네가 손 내밀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걱정해주어서, 그런 사람이 내게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되었어. 고…… 고마워.” 그녀의 말이 이어지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끝을 쳐다보았다. “그…… 그리고 그날 공사장에서 나 혼자 도망가서 정말 미안해.” 그 말을 할 때는 그녀 또한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난 후회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