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늪
어린 시절, 늪은 분명 마을로 내려왔었다. 아이와 노인은 볼 수 있는 것들.
“우습지? 하는 짓이 영판 네 어릴 때와 닮아서 볼 때마다 웃기더구나. 기억나니? 구름 위에 성을 본다며 까치발을 하고, 날아가는 민들레를 보면서 요정을 쫓는다며 대문 밖으로 뛰어가며 넘어지던 일 말이다. 나무를 따라 웃는다면서 갑자기 와르르 웃기도 했지. 까마득한 옛날 일인데도 늙을수록 그 일들이 마치 어제 일 같지 뭐냐. 가끔씩은 그, 뭐냐, 영화처럼 말이다……. 꼭 내가 죽은 뒤에 여기 넋으로 남아서 지나간 일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 32쪽
문이 열린다
잃어버린 반려자는 어디에서 찾나요? 아니, 꼭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한욱아. 왜 희망을 가져야 해? 왜 꼭 그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수많은 사람이 죽든 살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살아가고 있어. 얼마 전에 깨달았어. 그이가 돌아오면 줄 사랑이 아직 많기 때문에 그이를 그토록 기다린 걸까? 아니야. 아니었어. 오히려 그이에게 준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토록 기다린 거야.” - 52~53쪽
불의 춤
매년 봄의 제전에는 산 정상에서 화희들이 불의 춤을 추고, 사람들에게 불을 나누어 준다. 동녀가 화희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 단 한번, 사흘 동안 ‘사흘 남편’과 합궁해야 하며, 사흘 남편은 마을을 떠나야 한다.
“평생 잊지 못한다면, 평생 사랑하여라. 평생 불의 춤을 추어라.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균형을 잡고 다스려라. 부족하지 않으니 불타오르고, 넘치지 않으니 춤을 출 수 있다.” - 80쪽
사방들은 기다린다
아침마다 조깅하는 길에 있는 큰 저택에서 갑자기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헌데 도깨비들이 보이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우주가 흐르고 있어요. 가져가요. 주세요. 다음은 시인이에요. 올 거예요. 갈 거예요. 다음은 우리 차례예요. 갈 거예요. 만날 거예요. 울지 마세요.”- 121쪽
마을로 오는 기차
소유를 통해 열등감은 극복될 수 있을까? 열등감의 반대말은 정말로 우월감일까?
‘“기차가 올지 모른다고 모두 떠들고 있어.”
남편이 말했다. 그러자 부인이 웃지 못하는 남편 대신 웃었다. 웃음을 그친 부인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또 사람들이 사라질지도 몰라.”
부인은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남편이 울 수 없는 부인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본 후에 구슬프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 133쪽
백 마리째의 양
빗소리, 가래 끓는 소리, 끊이지 않는 지루함이 싫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첫마디가 모두 똑같아.”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수사가 네게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손을 써놨어.”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지친 목소리다.
“뭘 위해서?” - 154쪽
파국破局
약자들의 삶을 보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이다. 어떨 때는 인간이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천사는 우리 같은 사람을 만나주지 않아.”
지난 몇 년간 역에서 노숙하며 알게 된 노인이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천사를 찾아서 명골에 온 지 5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는 역이 고요한 어둠에 잠기는 밤마다 천사를 찾으려는 사연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사연은 매일 밤마다 달라졌다. 어떤 날 밤엔 부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했고, 다음 날 밤엔 병이 낫고 싶어서라고 했다. ? 165~166쪽
이 밤의 끝은 아마도
꼭 지키겠다는 의지와 복수심에 관하여. 날카로운 긴장으로 따뜻함을 그릴 수 있다면
여자는 내가 두 달 전까지 함께 살았던 연이의 절친한 친구이고 내게는 세 번째 여자다. 처음 함께 살았던 여자는 채 눈을 뜨기도 전인 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내 어미와 함께 지내던 늙은 남자의 이웃에 살던 여자였다. 강아지였던 나를 한시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을 만큼 귀여워했던 여자는 내 세상의 전부였고 죽을 때까지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 187쪽
어떤 밸런타인데이
마녀는 할 수 있다. 마음을 건네주는 일.
“어따, 초콜릿을 받을 남자가 참 행복하겠소.”
“할멈, 초콜릿에 눈물을 좀 섞어줄까? 싫어? 그러면 독을 조금 넣을까? 먹고 나면 제법 괴로울 거야. 어때? 지금까지 할아범이 속 많이 썩였잖아.” -217쪽
아내의 빛바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은 밸런타인데이였다. 그는 아침에 우중충한 파도에 젖은 기분으로 일어나 카리나를 배웅했다. 카리나는 초콜릿을 배달하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집을 떠났다. - 223쪽
돌아오는 여름이 다시 여름인 것처럼
절박한 배달사고. 사람의 죽음은 두 종류다. 내가 기억해 준다면. 나를 기억해 준다면.
고등학교 때는 나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단짝이 어느 날, 자신이 배달사업을 하는 외계인이라고 말하는 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극히 상식적이었던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휑하니 전학을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던 나유와 우스꽝스러운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 232쪽
꿈, 그 너머
드디어 내가 원하던 꿈을 이루었는데, 꿈 그 너머에...... 만약에......
나처럼 반만 드리머인 혼혈은 완전한 드리머의 꿈을 꾸지는 못한다. 지구인의 평범한 꿈과 드리머의 꿈을 번갈아 꾸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꿈과 개꿈을 구분하기 힘들 때도 많다. - 267쪽
사람들이 알고 싶은 미래는 진짜 미래가 아니라 ‘좋은 미래’ 같다. 처음에 드리머와 지구인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일상으로 말하는 드리머들에게 끊임없이 자극된 지구인들이 드리머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분명 드리머들이 ‘진실’을 이야기한 탓이다. 지구인은 드리머와 달리 미래를 알고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듣기 싫은 ‘나쁜 미래’를 말하는 입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 270쪽
어째서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불행이 예정된 선택인 줄 알면서도 불꽃에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불행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일까. - 277쪽
까마득히 먼 데로부터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주는 위로를 원하면 전화기만 들어올리세요!
그런데 지금 느끼는 기묘한 불안과 불쾌함은 상사 때문이 아니었다. 악마 같던 상사는 지금쯤 나이를 훨씬 더 먹어서 그토록 충성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궁창같이 여기던 삶을 좀 더 낫게 아니면 좀 더 비굴하게 이어가며 살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명히 서른하나도 아닌데.” - 289쪽
포스트잇
세상이 얼굴 대신 메모로 가득 찬다면 어떻게 당신을 알아보지요
“무한소수 있잖아요.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 그걸 볼 때처럼 어지러워요. 한 바닥 가득히 적힌 파이의 값을 본 적 있어요?” - 311쪽
별들이 빛나는 밤에
오늘 밤도 고독한 사람들이 서로 스치운다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특별해지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무심히 나를 스쳐가는 거리에서 단 한 사람만이 나를 알아본다면 삶은 자유와 설렘으로 넘쳐나겠죠. - 339~340쪽
나는 오늘도 게시판에 사소한 이야기를 남겨요. 여기 어딘가를 흔적 없는 유령처럼 떠도는 당신의 정신과 마음이 언젠가 나와 스쳤으면 좋겠어요. 당신과는 오로지 여기서만 스칠 수 있을 테니까요. - 340~341쪽